1세기를 버텨낸 곳에 들어선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가게 문을 여는 순간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이 머리를 훑고 가면 왠지 모를 신비한 기운에 휩싸이게 되는 걸까?
가게 곳곳 포근하게 내려앉은 먼지와 퀴퀴한 곰팡이 냄새, 더불어 옛것의 향기를 머금은 듯 오래된 가구들이 내뱉는 공기는 묘한 분위기를 형성할 것만 같다.
오래된 가게에 대한 환상과 막연한 기대감은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흔히 노포라고 칭하는 오래된 가게들은 사실 일본식 표현이다. 시니세라고 읽는 이 한자는 단순히 오래된 가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선조 대대로 가업을 지키며 이어 가는 것’ 오래된 가게들이 갖는 진짜 의미다. 대대손손 가업을 이어가며 전통과 문화를 지켜나가는 것이 보기 드문 일이 되어버린 한국 사회에서 최근 들어 전통을 살리고 가업을 지켜나가려는 활발한 노력이 감지되고 있다.
서울에도 백 년, 천 년 된 가게들이 거리 곳곳을 차지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군데서 묵묵히 가업을 이어 나가는 사람들. 무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온 서울의 오래된 가게들을 소개한다.
조선 후기 철종 대 1856년에 세워진 금박연은 현재 5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금박연 의 1대 장인은 조선 왕실 소속의 장인이었으며 조선 왕실 예복에 금박 입히는 일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세계 유일의 금박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붓으로 그림을 그려 금가루를 뿌리는 다른 나라의 기법과는 다르게 금박연은 도장을 사용한다. 나무로 만든 문양판에 풀로 탁본을 떠 옷에 찍는 기법으로 풀이 마르기 전에 금박을 붙여 작업한다. 현재 금박연의 5대 장인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금을 옷에 새기는 것은 일상복이 아닌 왕실 예복에만 해당하는 것이었다. 예식의 성격에 따라 금으로 새기는 문양은 연꽃, 모란, 석류 등의 꽃과 식물부터 거북이 혹은 한자 시구까지 다양했다고 한다.
한 세기 넘게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고 해서 전통만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시대에 발 빠르게 맞춰가고 있다. 관광문화상품 개발, 일반인 교육 및 체험 상품 개발에 힘쓰며 한국 전통의 금박 문화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고순어용: 고종과 순종이 즐겨 사용함
1913년 설립된 구하산방 은 벼루와 붓 등을 취급하는 필방이다. 한반도 최초의 필방으로 궁에 납품하며 고종과 순종의 사랑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구하산방 이전에는 각 동네의 생산자들이 좌판을 깔고 붓과 벼루를 판매했었다고 한다. 품질도 균등하지 못하고 필요할 때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구하산방이 생긴 이후에는 이런 불편들이 사라지고 품질 좋은 붓과 벼루를 마음만 먹으면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구하산방은 다양한 크기와 품질의 붓, 종이, 먹, 벼루, 연적 등을 취급한다. 1,000여 가지에 이르는 서화 재료는 만 원 미만의 학습용 붓에서부터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최고급 서호필까지 그 종류가 어마어마하다. (서호필: 쥐수염으로 만든 붓)
구하산’은 신선이 노니는 선계라는 뜻이다. 신선들이 모여 술 한잔하며 담소를 나누듯 구하산방은 명필가들과 화백들이 모여 연락을 주고 받는 곳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한다.
구하산방은 단순히 붓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 이외에 조선 고미술품 상점으로서 지속적으로 우리의 문화와 예술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황색/족제비털, 랑호/이리털, 우이모/소귀털]
서울에도 런던의 세빌로우(Savile Row) 못지않은 명성과 실력을 자랑하는 양복전문점이 있다. 바로 4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종로양복점 이다.
종로가 번화가이던 시절 국회의원 등 서울 시내의 모든 유명 인사가 찾아와 양복을 맞추던 곳으로 한국의 다사다난 했던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경험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바느질공장에는 재단사 등 직원만 200명이 넘었으며 하루에 10벌 이상, 한 달에 300벌 가까이 양복을 제작했을 정도로 성황을 이뤘지만 90년대 출연한 기성복 때문에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양복을 잴 때는 보통 20가지 신체 지수를 재는 데 사람마다 타고난 성질과 개성이 다르듯 이 치수도 모두 다르다고 한다. 종로양복점에서는 치수를 재는 작업도 굉장한 집중과 노력을 필요로 하며 치수를 바탕으로 양복 한 벌을 제작하는 데 넉넉하게 2주 가까이가 소요된다. 옷감을 고르고 치수를 재고, 3~4일 후 가품을 착용하여 잘 맞는지 확인한 후에야 가봉된 것을 뜯고 수정을 거쳐 비로소 한 벌의 양복이 완성된다고 한다. 정말이지 특별한 한 사람만을 위한 양복이 되는 셈이다.
서울 중구 저동 24가 78 을지비즈센터 618호
02-733-6216
베이징의 리우리창(琉璃廠)은 500년 골동품 거리, 교토의 규쿄도(鳩居堂)는 300년 역사의 종이 제품을 생산하는 곳으로 관광객은 물론 현지인들의 발길을 사로잡고 있다. 금박연, 구하산방, 종로양복점을 시작으로 서울의 종로•을지로 일대의 가게들도 500년, 1000년 이상 오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