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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화예술을 사랑한 일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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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우리는 한일수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았다.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와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지만, 덕혜옹주의 눈물 젖은 저고리가 9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것처럼 민간 차원에서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움직임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에도 조선 문화의 독자성을 주장하고 결국 조선 땅에 묻힌 아사카와 타쿠미가 그러했고, 일본의 대표적인 민예운동가인 야나기 무네요시도 광화문 철거에 반대하는 글로 조선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지켜냈다. 우리의 어두운 역사를 잊지 않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한편으론 조선의 문화와 예술을 아끼고 존중했던 이들처럼 서로를 동등한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성숙한 역사의식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조선의 문화예술을 사랑한 일본인들_약도

여행정보
코스 : 국립중앙박물관-낙선재-청계천문화관

코스 1 - '백자의 사람' 아사카와 타쿠미·조선민족미술관 설립한 야나기 무네요시

국립중앙박물관 전경

"일본인과 조선인이 서로 이해한다는 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인 건가?" 

영화 <백자의 사람 : 조선의 흙이 되다> 에서 아사카와 타쿠미는 자신을 비난하는 일본인들과 자신의 진심을 오해하는 조선인들 사이에서 이처럼 서글픈 한숨을 내쉰다. 당시는 일본이 조선의 통치권을 빼앗은 직후였고, 조선의 언어를 배우고 조선인의 옷을 입고 출근하는 그에게 누구든 고운 시선을 보낼 리 없었다. 일본의 임업기술자였던 그는 조선총독부 소속으로 근무하던 중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이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데 남은 인생을 바치게 된다. 그는 죽어서도 조선 땅에 묻히기를 희망했고 장례 또한 조선의 방식대로 치러달라고 유언했다. 그가 급성폐렴으로 목숨을 잃은 1931년은 일제의 침략전쟁이 본격화되는 시기였음에도 많은 조선인들이 서로 상여를 메겠다고 나섰다니 그의 오랜 애정이 마침내 조선의 마음을 움직였다 하겠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내부 전경

아사카와 타쿠미의 저서 <조선의 밥상>과 <조선도자명고>는 일본 민예운동의 시조로 불리는 야나기 무네요시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는데, 야나기 무네요시의 첫 번째 조선여행에서 실제 만남을 가진 이들은 식민지 통치 하에서 흩어지고 사라지는 조선의 예술품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공유하게 된다. 이에 자신들의 수집품을 전시할 수 있는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에 함께 뜻을 모은 이들은 조선총독부의 승인까지 얻어 지금의 경복궁 내 집경당에 전시공간을 마련하게 됐다. 조선민족미술관의 실질적인 운영은 아사카와 타쿠미가 맡았고 소장품의 수집과 방향은 야나기 무네요시가 앞장서서 이끌었는데, 미술사에 대한 개념과 이해가 부족했던 당시 조선사회에 이들의 노력과 성과는 신선한 자극제가 되었다. 특히 야나기 무네요시는 1922년 조선총독부가 청사 건립을 위해 광화문을 철거하려 하자 '없어지는 한 조선 건축물을 위하여'라는 논설을 통해 이를 지켜내는데 힘을 보태기도 했다.

국립민족박물관의 전신인 조선민족미술관에서 이관된 전시품들

광복 이후 조선민족미술관의 소장품은 국립민족박물관에 이관되었고 한국전쟁 직후엔 다시 국립중앙박물관 남산분관으로 옮겨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때문에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조선백자와 공예품 중에는 이들의 수집품이 상당수 포함돼 있는데, 유물코드 '남산'으로 시작되는 전시품들이 이에 속한다. 이들 외에도 2층 기증관에는 개인적으로 수집한 한국의 문화재들을 아무런 대가 없이 내놓은 일본인들의 전시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어 눈길을 끈다.
 
주소 및 전화번호 :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02-2077-9000
운영시간 : 09:00~18:00(수, 토요일 09:00~21:00/매주 월요일 휴관)
찾아가기 : 지하철 4호선 이촌역 2번 출구에서 걸어서 5분
 
TIP ① 아사카와 타쿠미가 묻힌 망우리공원
서울 망우리공원에 묻힌 유일한 일본인인 아사카와 타쿠미의 묘(좌)와 묘비 글(우)
아사카와 타쿠미의 일생을 소재로 한 영화 제목처럼 그는 조선 땅에 묻혀 조선의 흙이 되었다. 그의 묘가 자리한 곳은 중랑구의 망우리공원으로, 이곳엔 한용운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이중섭 등 유명 예술가들이 잠들어 있다. 망우리공원에 묻힌 유일한 일본인인 그의 묘지 앞에는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고 적힌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는 그의 한국인 동료가 제안해 만들어진 것으로 영화처럼 뜨거운 우정을 느낄 수 있어 한번쯤 들러볼만 하다.

TIP ② 서울 속 작은 일본 '리틀도쿄'
리틀 도쿄에 자리한 일본 식자재 전문점(좌)과 일본인 주방장이 운영하는 일식집(우)

국립중앙박물관이 위치한 이촌역 주변에는 서울 속 작은 일본으로 불리는 '리틀도쿄'가 자리하고 있다. 천여 명의 일본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곳에선 일본어로 적힌 간판과 안내문 등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골목 구석구석 일본의 식자재를 판매하는 마트와 선술집, 정통 일식집 등이 즐비해 마치 일본의 어느 거리처럼 이국적인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때문에 주말이면 일본 특유의 분위기를 만끽하려는 젊은이들로 북적인다.

코스 2 - '낙선재의 마지막 황족' 평생을 조선의 황태자비로 살았던 이방자(나시모토 마사코) 

조선의 문화예술을 사랑한 일본인들_메인

우리에게 이방자(李方子)란 이름으로 더 익숙한 나시모토 마사코는 일본왕족인 나시모토의 맏딸로, 겨우 스무 살을 갓 넘긴 해에 일본에 볼모로 잡혀와 있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이은(훗날의 영왕)과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그 스스로도 일본 정부의 정치적 희생양으로 간택된 서글픈 운명이었지만 평생 남편을 존중하고 낯선 땅 조선을 사랑하려 애썼다. 그녀는 자신의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에서 "일본은 나의 친정, 조선은 나의 시댁"이라며 "어느 곳도 공개적으로 편들거나 비난하거나 할 수 없는 처지인 나는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이 나 자신의 운명만을 슬퍼하며 혼자서 숨이 막히도록 고통을 참아내야 했다"고 결코 화려하지만은 않았던 황태자비의 운명을 고백하기도 했다.

생전의 이방자 여사가 사랑했던 낙선재의 후원(좌)와 아름다운 창살무늬(우)

1962년 한국 국적을 취득하며 끝내 조선의 여인으로 살 것을 선택한 그녀는 이듬해 남편마저 세상을 떠나고 낙선재에 홀로 남겨졌다. 회고록에서 그녀는 낙선재를 "28평의 아담한 규모이지만 이중 구들을 놓아 따뜻하고 창살무늬만도 25가지나 되는 등 구석구석에 정성을 쏟은 흔적이 보이는 집"이라고 묘사하면서 "언젠가 전하 곁에 가는 날에는 이 꽃향기, 시원한 바람소리, 돌담 틈의 흙냄새, 까치소리를 모두 전해드리고 싶다"며 남편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부모와 헤어져 강제로 일본으로 떠나야 했던 영왕은 아버지 고종이 보내준 낙선재 뒤뜰의 조약돌을 늘 주머니에 지니고 다니며 고국에의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때문에 이방자 여사는 낙선재에서 홀로 지낸 20여년 동안 남편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후원을 거닐며 남편을 향한 그리움을 달랬다. 그녀는 남편의 아호를 딴 복지법인 명휘원(明暉園)을 설립하는 등 남은 생 동안 장애인들을 위한 복지사업에 각별한 애정을 쏟았는데, 낙선재에 기부한 에어컨을 떼어다 복지시설에 가져다주고 본인은 무더운 여름을 선풍기 하나로 견딜 만큼 평생 검소한 황족의 삶을 실천했다. 낙선재의 마지막 여인이기도 했던 그녀는 슬픈 운명의 벗이었던 덕혜옹주가 눈을 감은지 아흐레 뒤인 1989년 4월 30일, 생전 자신의 조국이자 자신이 묻힐 곳이라 단언했던 이 땅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다. 아름답고 화려하기로 손꼽히는 창덕궁 한편에서 일본의 왕족으로 태어나 조선의 황태자비로 살다간 그녀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것도 의미가 남다르겠다. 
 
주소 및 전화번호 : 서울 종로구 율곡로 99, 02-762-8261
홈페이지 : www.cdg.go.kr
관람시간 및 관람요금 : 09:00~18:00(6~8월 09:00~18:30/11~1월 09:00~17:30, 매주 월요일 휴궁) 성인 3,000원
찾아가기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에서 걸어서 3분 
 
TIP ③ 일본 여류시인 이바라기 노리코가 사랑했던 조선의 시인 윤동주, 윤동주문학관
윤동주문학관의 전경

윤동주 서거 70주년을 맞은 올해, 도쿄와 교토 등 일본 전역에서 그를 기리는 행사가 마련되고 후쿠오카에선 윤동주 시비를 세우려는 모임이 발족하는 등 한국의 시인을 추모하는 열기가 뜨겁다. 이는 윤동주의 시가 국경을 넘어 일본인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는 반증이기도 한데, '내가 가장 예뻤을 때'의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도 "윤동주는 일본 검찰의 손에 살해당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통한의 감정을 갖지 않고는 이 시인을 만날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생전 그는 윤동주의 시에 매료돼 한글을 공부하고 직접시를 번역해 일본인들에게 소개하는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 옥인동에서하숙을 하며 아침저녁으로 산책삼아 오르던 인왕산 자락에 세워진 문학관은 그의 시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특별한 공간이다. 이곳에서 일본인들의 마음까지 울렸던 아름다운 시의 힘을 직접 느껴보는 건 어떨까?
 
주소 및 전화번호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의문로 119, 02-2148-4175
운영시간 : 10:00~18:00(매주 월요일 휴관)
찾아가기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1020, 7212번 버스를 타고 10분

코스 3 - 전 재산을 털어 조선 빈민을 도운 노무라 모토유키

청계천문화관을 이루고 있는 청계천박물관(좌)과 청계천 판잣집 체험관(우)

지난 2005년 새롭게 복원된 청계천에 세워진 청계천문화관은 서울의 역사 속에서 주요한 물줄기를 이뤘던 청계천의 다양한 모습과 의미를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 전시된 자료들 중에는 카메라가 귀했던 시절 일본인인 노무라 모토유키가 청계천변의 갖가지 풍경을 담은 사진 2만여점도 포함된다. 1958년 여행 삼아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그는 일제의 수탈과 전쟁의 후유증으로 피폐해진 서민들의 삶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게 된다. 이후 다시 한국을 찾은 그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본격적인 구호활동에 나서는데 그 대상지가 바로 청계천의 빈민가였다. 당시 청계천은 삶의 터전을 잃고 하루살이처럼 불안한 삶을 살아가던 도시 하층민들이 모여 살던 지역으로 어린 아이들까지 가난과 질병에 신음하고 있었다. 그는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이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기 시작했는데 이때 촬영한 귀한 사진자료들을 이후 서울역사 박물관에 기증하면서 '서울시 명예시민'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가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한 사진 자료들은 현재 청계천문화관으로 옮겨져 시민들과 만나고 있다. 또 지난 2012년에는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자리한 위안부 소녀상을 찾아 사죄의 눈물과 함께 가곡 '봉선화'를 연주하는 등 성숙한 역사의식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4월 '아시아 필란트로피 어워드'의 첫 번째 수상자로 선정된 그는 다시 한번 "일본인으로서 지난 역사를 사과하고 참회한다"고 소감을 전해 잔잔한 감동을 주기도 했다. 
 
주소 및 전화번호 : 서울특별시 성동구 청계천로 530, 02-2286-3410
운영시간 : 09:00~19:00(동절기 주말 09:00~18:00)
찾아가기 :지하철 1호선 제기역 4번 출구에서 청계천 방향으로 걸어서 15분 또는 지하철 2호선 
상왕십리역 2번 출구에서 마을버스 08번 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