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먹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단일메뉴를 고집하고 싶을 때. ‘먹자골목’이 당긴다. 모인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한 식당의 성공에 뒤이어 주변 다른 식당들이 메뉴를 변경한다거나, 흩어져 있던 노포들이 한곳에 모였다거나. 딱히 개성이 없던 전통시장이 하나의 먹거리로 새롭게 재조명되며 전에 없던 방문객의 발길을 끌기도 한다.
그러면서 역사가 만들어졌다. 30~40년째 같은 비법을 고수해 온 맛의 고수들이 골목골목에서 손님을 맞고 있다. 보장된 맛도 맛이되, 이들이 오랜 세월을 버텨 올 수 있었던 비결은 후한 인심에 있다. 주메뉴에 더해 기꺼이 내어주는 서비스와 덤은 대형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에서는 찾을 수 없는 ‘정’이다. 봄, 당기는 입맛에 맘껏 부응해 보자. 서울 구석구석에는 ‘먹자골목’이 포진해 있다.
‘공덕은 족발’ 공식의 시작은 30여 년 전을 거슬러 오른다. 시장 한편에서 순대국과 족발을 팔던 작은 식당 하나가 성업하자, 주변 가게들도 족발과 순대를 팔기 시작했던 것이 지금 공덕 족발 골목으로 이어졌다. 공덕역 5번 출구로 나오면, 맞은편의 현대적인 고층 건물과는 확연히 다른 오래된 전통시장이 눈에 띈다. 기본족발부터 한방족발, 궁중족발, 오향족발 등 시장 입구부터 다양한 간판을 내건 족발 식당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1967년 문을 연 공덕시장은 한때 서울 5대 명물 시장으로 꼽힐 만큼 성업을 이뤘으나 점점 재래시장의 입지가 줄어들었고 2007년 화재로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러다 방송 및 매체를 타며 족발 골목이 재조명되면서 인근 직장인들과 젊은 방문객들의 발길도 점차 잦아졌다. 서민적인 분위기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족발, 거기에 순대와 순대국 무한리필 서비스로 단골을 유지하고 있다.
공덕시장 바로 옆쪽으로는 전 시장이 자리한다. 육전, 생선전, 동그랑땡, 부추전 등 수많은 전 중에 먹고 싶은 것을 바구니에 골라 담으면 되는 뷔페 시스템이다. 고른 전은 따끈하게 다시 구워 상차림과 함께 내준다.
사실 냉면‘거리’라 부르기엔 조금 거창할지도 모른다. 중부건어물시장 바로 맞은편, 함흥냉면거리에 있는 냉면집은 ‘흥남집’과 ‘오장동 함흥냉면’ 단 두 곳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원조의 맛을 고수해 왔다는 점에서 오장동은 함흥냉면의 뿌리라 할 수 있다. 6·25전쟁 이후 남한으로 피난 왔던 실향민들이 오장동 주변에 자리 잡았고, 그들이 고향 음식인 함흥냉면을 만들어 먹었던 것이 이곳 함흥냉면거리의 시작이다.
오장동 함흥냉면거리에서 가장 먼저 개시한 냉면집은 ‘오장동 흥남집’이다. 1953년 함경도 흥남 출신의 고(故) 노용원 할머니가 문을 연 가게는 원래 ‘흥남옥’이었지만, 단골들이 ‘흥남냉면’이라 부르기 시작하면서 ‘오장동 흥남집’이 됐다. 곧이어 고(故) 한혜선 할머니가 ‘오장동 함흥냉면’을 오픈했고, 오장동 함흥냉면의 주방장이 독립해 1980년 ‘신창면옥’을 열었다. 아쉽게도 신창면옥은 2017년 폐업했지만, 오장동 흥남집과 오장동 함흥냉면은 아들에서 손자로, 3대째 여전히 성업 중이다. 오장동 냉면거리의 주메뉴는 단연 비빔냉면, 그중에서도 ‘회냉면’이다. 고구마 전분으로 뽑아낸 면에 시큼한 홍어무침과 무채, 오이를 얹어 낸 냉면은 자극적이지 않아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기 좋다. 사골과 소고기로 푹 고아낸 육수 또한 별미다.
건물 안에 들어서면 실내 재래시장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가게와 가게 사이 벽이 없이 오픈된 주방과 테이블을 구분하는 것은 ‘삼촌네’, ‘전라도여수’ 등 천장에 매달린 가게 상호다. 이들은 대부분 3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한다. 1960년대 후반 신림동 일대에서 영업하던 재래시장 순대집과 순대 노점상들이 1992년 민속순대타운 건물이 생기며 한곳에 모인 것. 지금은 ‘원조민속순대타운’과 그 옆에 바로 붙어 있는 ‘양지순대타운’ 두 건물이 순대타운의 양대 산맥처럼 자리하고 있다.
신림동식 순대볶음은 일반 순대볶음과는 사뭇 다르다. 순대와 곱창, 채소를 넣어 볶지만 빨간 고추장 양념 없이 들깨 가루와 참기름으로 감칠맛을 낸 ‘백순대’가 대표메뉴다. 60~70년대부터 신림동의 명물 음식으로 사랑받았던 서민 레시피가 지금까지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집에서 바로 조리해 먹을 수 있도록 포장도 가능하며, 전국 택배 서비스도 운영하고 있다.
생선구이 골목, 닭 한 마리 골목 등 내로라하는 먹자골목이 포진해 있는 종로 인근에서 보쌈골목은 다소 숨어 있다. 종로3가역 15번 출구에서 종로2가 방향으로 가는 뒷골목, 아는 사람만 찾아가는 좁은 골목에 오랜 내공을 다져 온 보쌈 노포들이 여럿 자리한다.
긴 기다림을 감수하고라도 단골들이 이곳 보쌈집을 찾는 이유는 무엇보다 신선한 재료에 있다. 20~30년 전통을 가진 보쌈집들의 주메뉴는 ‘굴보쌈’. 그날그날 푹 삶아 낸 야들야들한 돼지고기를 통영에서 공수해 온 탱탱한 생굴, 그리고 새콤한 무김치를 곁들여 제공한다. 박하지 않은 인심 역시 보쌈골목의 매력이다. 보쌈을 시키면 감자탕이나 닭볶음탕, 동태전과 두부전 등 집집마다 조금씩 다른 서비스 음식을 푸짐하게 내준다. 굴보쌈 이외에도 오징어보쌈, 홍어삼합, 감자탕, 닭볶음탕 등 술안주 메뉴들로 퇴근 후 주변 직장인들의 아지트로 사랑받고 있다.
삼각지역 1번 출구, 우리은행 건물 뒤편으로 세월의 흔적이 자욱한 대구탕들이 성업 중이다. 이 골목에 대구탕 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건 1979년, 지금껏 40년의 전통을 이어 왔다.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부터 주변 직장인 등 젊은 세대까지 지금이야 손님층이 다양하지만, 초창기만 해도 대구탕 식당의 주 손님층은 군인이었다. 당시 현재 전쟁기념관 자리에 있던 육군본부의 군인들이 대구탕 맛에 반해 입소문을 내기 시작한 것이 삼각지 대구탕골목을 외부로 알린 계기가 됐다. ‘외출 후에 부대로 돌아올 땐 이곳 대구탕 한 그릇을 꼭 먹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당시 군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단골의 입소문을 차치하고서라도, 몇십년 째 명맥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변치 않는 대구탕 맛이다. 맑은 국물로 우려낸 대구탕과 고춧가루를 넣어 끓여 낸 대구탕, 두 가지 모두 자극적이지도 질리지도 않는 맛이 특징이다. 주메뉴에 자신 있으니 반찬은 단출히 아가미젓갈과 무절임, 김치 정도만 낸다. 콩나물과 미나리, 알이 듬뿍 들어간 탕을 먹은 뒤 볶음밥으로 마무리하는 방식이 독특하다.
왕십리역에서 도보로 약 10분, 성동구청이 자리한다. 그곳의 맞은편에는 항상 고소한 냄새가 가득하다. 곱창 굽는 냄새, 왕십리 곱창거리다.
과거 서울 성동구 황학동사거리부터 왕십리 방면의 마장로까지 수많은 곱창집이 자리했다. 당시 왕십리에는 작은 철공소들이 밀집돼 있었으며, 비교적 가난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인근 마장 축산물 시장에서 팔고 남은 돼지나 소의 곱창, 막창, 대창 등을 연탄불에 구워 팔았던 것이 골목의 시초다. 현재 과거의 왕십리 곱창거리는 2008년 뉴타운 개발사업으로 인해 사라지고 성동구청 건너편 일대로 터전을 옮겨 성업 중이다. 마장동 축산물 시장과 1km 남짓 떨어진 거리기 때문에 재료 수급이 더욱 원활해졌으며, 이전보다 훨씬 쾌적한 환경을 자랑한다.
이전에는 연탄불로 곱창과 막창, 대창을 구워냈기 때문에 자욱한 연기가 문제였다면 현재는 환풍기가 가득한 별도의 조리 공간에서 곱창을 초벌 해 내어준다. 곱창을 구워내는 특별한 기술 없이도, 그저 불판 앞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먹을 수 있는 셈이다. 가장 사랑받는 메뉴는 소 모둠곱창과 돼지야채곱창. 소 모둠곱창은 마장동에서 잡은 소의 곱창, 양, 염통, 대창 등이 포함되며 간과 천엽은 서비스로 제공된다. 돼지야채곱창은 돼지곱창 특유의 노릿한 냄새를 없애기 위한 과거의 조리법이다. 빨갛게 볶아진 곱창과 잘 익은 양배추, 당면을 한껏 집어 생마늘 얹은 깻잎에 싸 먹는 것이 정석.
주꾸미는 봄이 제철이다. 5~6월 산란기를 앞두고 3~4월쯤 알이 꽉 들어차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주꾸미를 가장 쉽게 맛볼 수 있는 곳, 성내동 주꾸미 골목이다. 1970년부터 골목에 하나둘 주꾸미 음식점이 들어서더니,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고. 현재는 주꾸미 음식점 약 12곳이 영업 중이다. 거리 중간중간 주꾸미 벽화도 크게 그려져 있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주메뉴는 대부분 고추장 양념을 해 구워 먹는 주꾸미볶음이며 함께 넣는 재료는 새우, 곱창 등 다양하지만 역시 인기는 삼겹살이다.
매콤한 주꾸미는 삼겹살 특유의 느끼한 맛을 없애주고 주꾸미에 들어있는 타우린 성분은 돼지고기의 지방과 콜레스테롤이 체내에 흡수되는 것을 억제하기 때문에 완벽한 궁합을 자랑한다. 매운맛은 취향대로 조절할 수 있지만, 평범한 이들에게 보통 맛도 살짝 매콤하게 느껴지는 편이다. 그럴 때는 콩나물을 좀 더 추가해, 첨가하면 매운맛을 줄일 수 있다. 대안으론 최고의 궁합, 쌈무와 마요네즈가 있다. 마무리로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은 볶음밥. 매콤한 양념에, 남은 주꾸미를 잘게 잘라 고소한 버터와 볶아낸다.
주꾸미로 부른 배를 부여잡고 산책할 만한 곳을 찾는다면, 순수한 감성이 넘치는 강풀 만화거리를 추천한다. 성내동 주꾸미 골목은 5호선 천호역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위치한다. 차로 이동할 경우 별도 주차공간이 마련되어 있지 않으니, 천호역 공영주차장을 이용해야 한다.
동대문 생선구이골목은 서울 광장시장과 동대문 패션타운을 연결하는 길목에 위치한다. 차 한 대 정도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골목 양옆으로 생선구이집이 즐비해 있다. 20여 년 전, 일대에 봉제공장이 붐볐던 시절, 공장 노동자들로 호황을 이루었던 역사가 있다.
생선은 전부 연탄불로 구워낸다. 가스 불로 굽게 되면 생선이 기름을 먹어 담백하지 않고 느끼하기 때문이다. 은은한 연탄불에 생선을 3~5번 정도 뒤집으며 부드럽게 속살까지 익힌다. 간은 심하게 짜지 않다. 소금을 너무 많이 치게 되면 생선의 고소한 맛을 가리기 때문에, 소금 간은 적게 하는 편이다. 모든 식당이 길목에 빼곡히 아궁이를 내놓고 생선을 구워내는 탓에, 식사시간이면 골목이 뿌연 연기로 덮인다.
생선 종류는 다양하다. 고등어, 삼치, 조기, 갈치, 임연수 등. 국내 관광객은 고등어를, 일본인 관광객은 삼치를, 중국인 관광객은 조기를 주로 찾는다고 한다. 최근 중국인 관광객들이 골목을 많이 찾고 있어, 중국어가 가능한 종업원을 둔 곳이 많다. 생선을 주문하면 전부 ‘백반’ 형태로 제공된다. 생선은 주문 즉시 구워내기 때문에, 밥과 반찬이 먼저 나온다. 기다리며 야금야금 먹다가는 생선만 먹어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기 때문에, 속도를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1980년대, 갈치는 매일 밥상 위에 오르는 흔한 생선이었다. 당시 남대문 시장에서는 값싼 갈치를 상인들의 입맛에 맞춰 매콤하게 조려 내놓았고, 그것이 입소문을 타며 지금은 ‘남대문 갈치조림 골목’을 만들게 되었다. 지금은 너무 비싸 ‘금갈치’라고 불릴 정도지만, 남대문 갈치조림은 여전히 저렴한 편이다. 그렇다고 재료가 좋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식당마다 사용하는 갈치 산지는 다르지만 보통 여수 갈치, 제주 갈치, 목포 갈치 등 국산 갈치를 사용한다.
숭례문 수입상가 맞은편에 들어서면 마치 미로를 연상케 하는 꼬불꼬불한 좁은 골목이 펼쳐진다. 어느 골목 어귀를 돌아도 보이는 것은 ‘갈치조림’이라고 적혀 있는 간판들. 콧숨을 들이쉬면, 간질간질하다. 매콤한 냄새 덕에 재채기가 나오기도 한다.
남대문 갈치조림 골목에 자리한 식당 대부분은 적어도 20년에서 40년까지 된 노포다. 사실 맛은 어느 집을 선택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세월의 흔적이 잔뜩 묻어 나오는 냄비에 쌀뜨물을 붓고 무를 바닥에 깐다. 그 위 토막 낸 갈치를 얹고 다진 마늘, 파, 고춧가루 등 양념을 얹어 무가 살짝 탈 정도로 자글자글 조려낸다. 갈치조림은 양쪽 잔가시를 제거하고 깨끗하게 발라낸 몸통 살을 조림 국물에 적셔 먹는 것이 정석이다. 살짝 타기 직전의 말캉한 무는, 흰밥과 최고의 조합이다.
서울 회기역 1번 출구에서 도보로 5분이면 파전골목에 도착한다. 기름때 가득한 골목이겠거니 생각했지만, 상당히 깔끔하다. 이곳은 2016년, 회기역 파전골목 입구에서부터 중앙선 회기역 주변 환경개선 공사를 마쳤기 때문에 비교적 쾌적하게 돌아볼 수 있다.
회기역 파전골목에는 약 10여 개의 파전집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경희대, 서울시립대, 한국외국어대, 광운대 등 서울 동북부 지역의 대학생들에게는 이미 소문난 맛집들이다. 저렴한 가격에 두툼하고 푸짐한 파전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대학생들의 미팅 장소로도 사랑받았다고 한다. 골목에서 가장 오래된 파전집은 ‘나그네 파전’이다. 무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곳에서 파전을 부쳐왔다. 3cm가 넘는 두께에 간간이 새우, 오징어, 바지락 등 쫄깃한 해물이 씹힌다. 파전의 단짝, 막걸리까지 한 잔 곁들이면 부러울 것이 없다.
최근 젊은 층의 호응을 얻고 있는 집은 ‘이모네 왕파전’이다. 파전을 한입 베어 물면 전이라는 느낌보단 튀김이라는 느낌에 가까울 정도로 바삭하다. 거기에 양파를 썰어 넣은 간장이 감칠맛을 더한다. 곧 시작될 장맛비에 어울리는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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