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서울은 온도도 햇살도 딱 좋다. 혼자 길을 거닐면 바람은 건조하지 않고 햇살은 따스해서 서두를 것 없이 자유롭게 혼자 출발하기 안성맞춤이다. 나는 경복궁 동쪽에서 출발해 천천히 네 곳의 전시관 사이를 걷고, 환승하고, 생각하고, 발길을 멈추며 역사와 예술로 포근한 하루를 채웠다.
■ 경복궁 옆의 아침, 국립현대미술관에 들어서다
이른 아침 첫 번째로 향한 곳은 경복궁 옆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MMCA Seoul)이었다. 회백색 건물이 옛 성곽 밖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는데 한쪽은 북촌의 한옥 풍경이 다른 한쪽은 탁 트인 잔디밭과 투명한 유리 건물이 있다. 현대와 전통이 맞닿는 경계선 이곳이 바로 그 교차점이다.
미술관 내 상설전시“한국 현대미술의 정수”는 전쟁 이후부터 현재까지 한국 예술 발전의 맥락을 보여준다. 교과서처럼 연대별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에서 구상으로, 개인의 경험에서 사회적 이슈로 주제에 따라 작품을 연결해 놓았다. 각각의 작품은 마치 하나의 시간 조각처럼 예술가들이 현실을 어떻게 느끼고 반응하는지 기록하고 있다. 나는 천천히 걸으며 작품을 억지로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그저 잠시 멈춰 작품이 내게 어떠한 인상을 남기도록 바라보았다.
다른 전시홀에서 나는 론 뮤익(Ron Mueck) 개인전을 마주했다. 거대하고도 고요한 인체 조각들은 쉽게 다가가기 망설여질 정도로 사실적이었다.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젊은 여자, 하얀 침대 위에서 사색에 잠긴 노부인,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배 위에 혼자 앉아 있는 남자. 이들이 너무나도 조용해서 공간 전체가 숨 죽이고 있는 듯했다. 작품 앞에 서자 나도 모르게 숨이 천천히 쉬어졌는데 나도 이들 중 하나가 된 듯했다.
미술관을 나설 때 햇살이 참 좋았다. 투명한 천창 아래로 내려온 빛이 바닥에 펼쳐졌다. 나는 중정에 놓인 의자에 앉아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는 초목의 내음과 도시의 잔잔한 온기가 섞여 있었다. 이번 전시관은 전시 여정의 하루를 시작하는 나에게 좋은 출발점이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소격동 165
월, 화, 목, 금, 일요일 10:00~18:00 / 수, 토요일 10:00~21:00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약 759m(도보 약 14분)
■ 서울공예박물관, 디테일 속에 감춰진 전통의 온도
삼청동 길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서울공예박물관이 나온다. 왕조 시대 옛터에 지어진 박물관으로 기존의 궁궐 구조를 유지하며 현대 건축의 미감을 담아냈다. 벽돌 담장, 나무 격자창, 개방형 정원은 자연과 공간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전시품은 한지, 칠기, 목기, 편직 등 전통 공예가 중심으로 수가 많지는 않지만, 디테일이 풍성하다. 많은 작품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 실밥, 이음선, 망치 자국까지도 생생히 보인다. 나는“빛”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공예품을 전시하고 있는 특별전을 만났다. 북 모양의 설치물이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공중에 뜬 등불 같기도 하고 아직 울리지 않은 북 같기도 했다. 섬세한 도안과 구불구불한 선으로 이루어진 받침대는 구름 같기도, 돌덩이 같기도 했다. 작품 전체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고 고요하면서도 묵직했다.
전시장이 크지 않아 한 시간 정도면 모두 둘러볼 수 있는데 발걸음이 그리 쉽게 빨라지지는 않는다. 특별한“포토 스폿”이 있는 것도 아닌데 더 집중해서 바라보게 된다. 혼자 와서 천천히 걷고 보기에 안성맞춤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175-112
화, 수, 목, 토, 일요일10:00~18:00 / 금요일 10:00~21:00 / 매주 월요일 휴관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약 137m(도보 약3분)
■ 리움(Leeum) 삼성미술관, 현대 예술과 건축 미학의 결합
오후에는 한남동으로 향했다. 언덕을 오르는데 나무 사이로 리움 삼성미술관의 상징적인 원형 건물이 비밀스러운 입구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전시관은 세 명의 세계적인 건축가가 설계한 세 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스타일이 전혀 다르다. 마리오 보타의 붉은 벽돌로 된 기하학적 건축은 묵직하고 안정감이 있으며, 장 누벨의 검은 유리 건축은 날렵하고 절제되어 있다. 렘 콜하스의 나선형 계단은 공간 실험 장치의 같은 느낌이다. M1관에는 전통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청자, 불상, 금속 공예품 등 차분한 색조와 절제된 전시 방식으로 천천히 감사하기에 좋다. M2관에는 현대와 동시대 작품이 있어 흐름이 더 빠르고 색채도 더 강렬하다.
마침 피에르 위그의 『문턱(Thresholds)』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어둑하고 반쯤 열린 전시 공간에 식물, 영상, 소리, AI 장치가 뒤섞여 있어 약간은 혼란스럽고 불확실한 느낌을 주었다. 전시를 보고 있는 동시에 어떤 시스템이 조용히 나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모두가 좋아할 만한 전시는 아니지만, 오히려 그래서 혼자 보기에 좋은 전시였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역시 그 유명한 컬러 천창이었다. 햇빛이 색유리를 통과해 계단과 벽면에 내려앉고 색이 각도와 시간에 따라 움직였다. 많은 사람이 사진을 찍었지만, 나는 그저 잠시 멈춰 색이 변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특별한 생각은 없었고 이렇게 빛이 실내로 스며드는 방식이 참 조용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742-1
화요일부터 일요일10:00~18:00 / 매주 월요일 휴관 / 1월 1일, 설날 및 추석 당일 휴관
6호선 한강진역 1번 출구에서 약 400m(도보 약7분)
■ 국립중앙박물관: 천 년을 넘나드는 한국의 서사
마지막 여정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번 시티워크의 종착지이다. 한강변에 한국 최대 규모의 국립 박물관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유물을 차근차근 펼쳐 보인다. 이곳에서는 역사가 공간 안에 녹아 들어 유물 하나하나의 틈사이에 숨어 있다.
전시실 안에서 나는 다시 한번 국보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마주했다. 불상은 무언가를 듣는 듯,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고요히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사유에 잠겨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가고 다시 돌아와도 시종일관 움직임 없이 이 도시를 위해 그 자리에서 지켜보는 어떠한 시선 같았다.
해질 무렵 박물관을 나서니 하늘빛이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잔디 위에 황금빛과 주황이 어우러진 햇살이 내려앉고 저 멀리 남산타워가 노을 속에 떠오른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고요한 마침표처럼.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 6가 168-6
월, 화, 목, 금, 일요일10:00~18:00 / 수, 토요일 10:00~21:00 / 2025년 휴관일 4.7(월), 11.39(월)
4호선·경의중앙선 이촌역 2번 출구에서 약 309m(도보 약 7분)
하루 종일 명소를 찍고 다닌 것도 아니고 바쁘게 이동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혼자서 전시관과 전시관 사이를 천천히 걸어 다녔다. 서울은 빠르게 움직이는 도시이지만, 이러한 공간 안에서는 역사와 예술에 조용히 다가갈 수 있으며 시간도 천천히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