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을 뚫고 매화가 봄을 깨우면 산수유, 목련, 벚꽃이 차례대로 피어난다. 이 즈음엔 키 큰 꽃나무 덕에 고개 들어 하늘 보는 시간이 잦다. 벚꽃이 지면 키 작은 꽃들의 시간이 시작된다. 유채꽃, 튤립, 장미가 만개하고, 들꽃이 피어나 세상이 더욱 다채로워진다. 봄이 오면 꽃 천지가 되는 서울, 봄을 만끽할 만한 장소는 어디일까. 서울 구석구석 속속들이 알고 있는 30년 베테랑 택시 기사에게 봄 꽃놀이 명소를 추천받았다.
01. 왕실 가족의 꽃 대궐, 창경궁
1970년대에 고등학생이던 택시 기사의 소풍 장소는 창경궁이었다고 한다. 창경궁은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경희궁과 함께 서울 5대 궁궐 중 하나로 원래 조선시대 왕실 가족의 생활 공간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궁궐 내 전각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사용했고, 이름도 창경원으로 격하됐었다. 변경된 시설을 철거하고, 발굴조사를 통해 창경궁의 모습을 복원하기 시작한 것이 1983년이니 택시 기사의 소풍지는 창경원이었던 셈이다. 이곳의 꽃이 아름다운 이유가 있다. 창경궁 이전의 이름은 수강궁, 왕이 된 세종이 아버지 태종을 위해 지은 궁이었다. 이후 성종은 대비인 정희왕후와 생모인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궁을 수리하고 확장하면서 이름을 창경궁으로 바꿨다. 왕실 가족 중에서도 여성을 위한 공간이었기에 정원이 특히 아름다웠던 것이다.
4월이 되면 창경궁은 정문인 홍화문 너머 옥천교를 중심으로 자두나무와 살구나무, 앵두나무가 꽃을 피운다. 당시에는 꽃보다 열매가 목적이었는지, 궁궐 내에서 꽃을 피우는 나무는 대부분 과실수다.
옥천교를 건너 문을 하나 지나면, 정면에 보이는 것이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이다. 꽃을 보러 와서 인지 명정전 천장과 창살에 새겨진 꽃 문양이 눈에 들어온다. 명정전 옆 문정전과 함인정은 왕의 공간이고, 함인정 너머의 건물이 대비의 공간, 그 너머가 왕비의 공간이다. 자세히 보면, 전각 전체가 계단식 화단인 ‘화계’에 둘러싸여 있다. 방에 앉아 창을 열면 바깥의 꽃들이 액자에 걸린 것처럼 집안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4월 말 살구나무가 진 자리에는 풀또기와 철쭉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창경궁 내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인 ‘대온실’이 있다. 1909년 준공 당시 열대지방 관상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을 전시했던 곳이다. 창경궁 복원 후 대온실에는 한국의 자생식물이 자라고 있다. 대온실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는데, 일제강점기 창경궁을 훼손할 때 이곳을 유원지로 만들기 위해 판 것이라고 한다. 창경궁을 복원하면서 우리나라 전통양식에 맞게 가운데 인공 섬을 조성하는 등 고쳐 지었다. 살구꽃도 홍매화도 진 궁궐에는 초록색 잎사귀가 무성했지만, 상대적으로 볕이 덜 드는 대온실로 가는 길에는 다양한 꽃이 남아 있었다.
서울 종로구 창경궁로 185
화~일 09:00 - 21:00 (매주 월요일 휴무)
지하철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 702m
Tip. 창경궁 야간 개장, 물빛연화
창경궁 물빛연화는 창덕궁 달빛기행, 경복궁 별빛기행, 덕수궁 밤의 석조전과 함께 4대 궁 야간 프로그램이다. 저녁 7시부터 춘당지를 중심으로 창경궁 내 8곳을 각기 다른 주제의 미디어아트 작품으로 꾸미는데, 창경궁 입장객은 누구나 별도의 예약 없이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02. 날마다 새로운 생태공원 서울숲
요즘 서울에서 가장 힙한 동네, 매일 새로운 팝업 스토어가 오픈하고 다양한 이벤트가 진행되는 성수동. 택시 기사가 추천한 두 번째 봄꽃 스폿은 성수동 서쪽의 서울숲이다. 친구나 연인, 가족과 함께 피크닉을 즐기기 좋고, 성수동으로 이동해 쇼핑을 하거나 카페에 가기도 좋으며,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따라 달리기도 좋다. 조선시대 왕들의 사냥터였던 이곳에 1908년 대한민국 최초의 정수장이 세워졌고, 1940년대에는 유원지로 개발됐다. 한때 경마장과 골프장으로 사용됐던 이곳이 숲으로 조성된 것은 2005년. 개장 당시 100여 종의 나무 42만 그루를 옮겨 심었는데, 한국 고유종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갤러리정원, 구근정원, 어린이정원, 꿀벌정원, 도시락정원, 벤치가든, 수국정원, 겨울정원 등의 테마 정원을 조성해 계절마다 풍경이 달라진다. 과거의 시간을 기록하려는 듯 생태공원으로 바뀐 지금도 공원 가운데 군마상을 세우고 수도박물관도 남겨뒀다.
4~6월의 서울숲에는 수많은 꽃이 피는데, 그만큼 많은 시민들이 찾는다. 벚꽃과 살구꽃이 터널을 이루는 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나 캠핑의자를 가져와 피크닉을 즐긴다. 4월 중순을 넘어가면 튤립의 시간이 시작된다. 튤립 군락지는 군마상부터 겨울연못을 지나 물놀이터까지 이어지는데, 모양과 색이 모두 다르다. 커다란 나무 아래 얕은 언덕 위를 빼곡하게 뒤덮은 튤립은 해마다 많은 사진작가들을 불러 모으기도 한다. 튤립은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올 봄에는 비가 많이 내려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고 한다. 튤립이 지고 나면 5월에는 작약, 6월에는 수국이 차례로 피어난다. 서울숲에 가면 꽃이 한꺼번에 피지 않고 순차적으로 피는 것이 인간을 사랑한 신의 가장 다정한 선물이라고 믿고 싶을 만큼 때마다 풍경이 달라진다.
서울시 성동구 뚝섬로 273
생태숲 05:30 - 21:30 / 곤충식물원 10:00 - 17:00 / 나비정원 10:00 - 17:00
지하철 수인분당선 서울숲역 4번 출구, 691m
Tip. 서울숲은 넓다.
서울숲은 15만 평에 달하는 넓은 면적의 도심 공원으로, 출입구가 15개가 넘는다. 공원은 크게 4개로 구성된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PARK1에는 서울숲광장을 비롯해 바닥분수, 거울연못, 각종 테마 정원이 있고, PARK2에는 생태숲과 사슴 우리, 바람의 언덕 등이 있다. PARK3에는 곤충식물원과 작은 동물의 집, 꿀벌 정원, 나비 정원 등이 있으며, PARK4에는 생태학습장, 유아 숲 체험장, 조류관찰대, 습지생태원 등이 있다. 생태숲을 가로지르는 스카이 로드는 한강시민공원으로 이어진다.
03. 강 따라 이어지는 튤립 길, 중랑천
택시 기사는 중랑천길을 두고 “서울에서 아름답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꽃길”이라고 했다. 중랑천은 양주와 의정부를 거처 서울 북동부 일대를 지나 한강과 만나는 강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강변을 따라 벚꽃, 튤립, 유채, 장미, 백일홍, 코스모스 등이 피어나 다양한 테마의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택시 기사는 “4월 중순부터 5월초까지는 튤립이 가장 좋을 때니 경의중앙선 응봉역에서 용비쉼터까지 이어지는 길을 천천히 걸어보라”고 했다.
응봉나들목을 지나 중랑천길로 들어서면 강 바람에 흔들리는 튤립이 반갑다고 인사를 건넨다. 앞서 걷는 사람을 따라 우회전하니 머지않은 곳에 ‘어린이꿈정원’이 보인다. 2024년 식목일에 마을 주민과 어린이들이 함께 조성한 정원이다. 다양한 야생화와 함께 포토존과 흔들의자를 설치해 기념사진을 남기기 좋다. 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튤립 사잇길을 더 걷다 보면 ‘철새관찰지’가 나온다. 중랑천과 청계천이 만나 한강으로 합류하는 이 지역은 서울시가 지정한 1호 철새보호구역이다. 강가의 갈대숲은 봄부터 가을까지 쉬지 않고 꽃이 피는 이곳의 겨울을 지키는, 철새들의 놀이터인 셈이다. 조금 더 걸으니 튤립 정원이다. 물푸레나무 아래 알록달록한 튤립이 군락을 지어 피어 있다. 엄마 손잡고 산책 나온 아이, 예쁜 드레스를 차려 입고 사진 촬영하는 소녀, 모임을 마치고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는 어르신 모두 꽃보다 밝은 얼굴로 꽃 사이를 걷는다. 튤립 길은 중랑천 피크닉정원부터 용비교까지 1.4km가량 이어진다. ‘일상 속 여행’을 주제로 올해 새롭게 조성한 ‘피크닉 정원’은 수국이 만개하는 6월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 성동구 중랑천(응봉역 ~ 용비쉼터)
상시운영
경의중앙선 응봉역
제17회 중랑 서울장미축제
서울에서 가장 많은 장미꽃이 피는 곳도 중랑천이다. 해마다 5월이면 중랑장미공원에서 ‘중랑 서울장미축제’가 열린다. 중랑천에 장미를 심기 시작한 것은 1999년부터다. 넝쿨 식물이라는 장미의 특성을 살려 2005년 장미터널을 만들었고, 주변으로 다양한 장미 정원을 조성하며 규모가 커졌다. 올해로 17회를 맞는 ‘중랑 서울장미축제’는 5월 16일부터 24일까지 중랑천 장미터널(길이 5.45km) 일원에서 펼쳐진다. 메인 행사인 ‘그랑로즈페스티벌’은 5월 16일부터 18일까지 3일간 진행되며, 5월 24일에는 겸재교 일대에서 ‘중랑 아티스트 페스티벌’이 개최된다. 이외에도 축제 기간 동안 중랑천 일대 곳곳에서 다채로운 문화예술공연과 전시가 펼쳐질 예정이다.
기간 2025년 5월 16일 ~ 24일
장소 서울시 중랑구 중랑장미공원(묵동교 ~ 겸재교 중랑천 일원)
문의 중랑문화재단(www.jnfac.or.kr)
사진 카피라이트 : 중랑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