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옆 원서동 산책이 즐거운 이유는 옛것과 새것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높은 하늘 아래 낮은 지붕들 사이로 아기자기한 작은 가게도 모여 있어 골목골목 느리게 걷다 보면 어느덧 차분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하루의 끝에 다다른다.
원서동 산책의 가장 좋은 시작은 가장 오래됐으면서 가장 매력 있는 창덕궁이다. 특히 창덕궁 안의 비원(후원)은 조선 시대 왕들이 즐겨 찾은 아름다운 정원으로 꼭 들러야 한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정해진 시간에 관람해설사와 함께 입장할 수 있는데 도보로 부용지, 애련지를 지나 존덕정, 연경당을 관람하는 코스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색다른 분위기를 뽐내 언제 들러도 새롭다. 후원에서는 도시의 소음이 들리지 않는다. 모처럼 도시 소음에서 벗어나 휴식을 누릴 수 있는 기회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 이곳은 그가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1918년에 직접 설계한 목조 한옥으로 근대 초기 한국 주택의 대표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고희동 화백은 이후 41년간 이곳에 거주하며 많은 예술 활동을 펼쳤다. 긴 복도와 유리문, 개량 화장실 등 전통 가옥과 근대건축 양식이 혼재된 ㅁ자형 구조이다. 고희동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실과 실제 작품 활동을 하던 화실, 근대 예술가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사랑방이 보존돼 있다.
창덕궁 길을 걷다 보면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인상적인 벽돌 건물이 눈에 띈다. 지금은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가 된 구 공간사옥으로 한국 현대건축의 시작점과 같은 곳이다. 1971년 처음 건립해 현재는 등록문화재 제568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남다른 의미가 있다. 김중업과 함께 한국 현대건축의 1세대로 꼽히는 김수근은 1960년대에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서울의 건축 흐름을 바꿔놓았다. 워커힐 힐탑바, 세운상가, 샘터 사옥(현 공공일호) 등 서울 곳곳에 그의 작품이 남아 있다. 기왓장 느낌의 검은 벽돌은 창덕궁 및 인근 한옥과의 조화를, 담쟁이덩굴은 자연과의 상생을 의도한 것이다. 1977년에 한 번 증축했으며 그로부터 20년 후 사방이 뚫려 아름다운 원서동 풍경을 담아내는 유리로 된 신관을 지었다. 그리고 2002년에 구관과 신관을 잇는 한옥을 고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마을버스가 유일한 대중교통 수단인 원서동은 느리고 소박하게 자신의 영역을 지켜나가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다. 이곳 창덕궁 돌담길을 따라 오래된 골목길 사이사이에 개성 있는 카페, 공방, 소품 가게 등 새로운 문화가 스며들어 아기자기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조용하고 외진 곳을 찾아 원서동에 자리 잡은 페얼스. 브랜드 페얼스의 쇼룸이자 빈티지 상품과 국내외 브랜드를 취급하는 편집숍이다. 일부러 한적한 곳을 고집한 이유 또한 취향이 맞는 사람들이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1970년대 소울, 펑크 장르의 희귀 음반과 리바이스 501 빈티지, 그리고 귀걸이 브랜드 프루타 제품이 인기다. 그 시대의 문화와 분위기가 배어 있는 제품 위주로 구성되어 있어 안목 높은 수집가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하다.
아라리오뮤지엄 신관에 자리한 다이닝 인 스페이스는 서울을 배경으로 코스 요리를 즐길 수 있는 프렌치 레스토랑이다. 이곳을 이끄는 노진성 셰프는 프렌치 방식을 기반으로 하되 재료에 따라 재해석한 창작 요리를 선보인다. 메뉴판에는 오직 식재료 이름만 적혀 있다. 메뉴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각자의 상상력을 발휘해 음식을 있는 그대로 즐기도록 하기 위함이다. 노진성 셰프가 자신 있게 선보이는 메뉴는 ‘성게알, 레몬’. 말 그대로 성게알과 레몬을 이용한 요리다. 스시에서 영감을 얻어 식초 대신 레몬 제스트를 사용하고 어린잎과 우니, 크림을 활용해 식전 메뉴를 만들었다. 입맛에 따라, 취향에 따라 훌륭한 음식과 다이내믹한 서울의 풍경을 함께 즐기기 위해선 사전 예약은 필수다.
마포구 도화동의 2층짜리 양옥집에서 시작해 전국구로 이름을 알린 프릳츠 커피 컴퍼니의 2호점이다. 생두를 구매해 직접 로스팅한 원두로 커피를 내리고 현장에서 빵을 만든다. 그 덕에 ‘믿고 먹는 프릳츠’라는 별명을 얻으며 많은 마니아를 거느리기도 했다. 아라리오뮤지엄 신관 1층에 자리한 원서점은 신관 1층에서 커피와 빵을 구입한 뒤 밖으로 나가 한옥에서 먹는다. 의외의 조합이지만 고소한 빵과 커피의 향이 한옥의 나무 향과 어우러져 색다른 느낌을 준다.
원색의 각 잡힌 쇼퍼백들이 눈길을 끄는 피브레노는 데스크패드, 연필꽂이, 키 링, 트레이 등 데스크 웨어 전반의 제품 라인과 가방 라인을 판매하는 스테이셔너리 부티크 숍이다. 시각 디자인을 전공하고 패션 MD로 일하다 가죽의 매력에 빠져 이탈리아 피렌체의 가죽 학교 스콜라 델 쿠오이오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곳이다. 깔끔하고 심플한 선이 돋보이는 컬러풀한 디자인의 실용적인 제품이 주를 이룬다. 천연 가죽이 데스크 소품의 소재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 대표는 가죽 느낌을 살린 고급스러운 합성피혁을 사용한 제품을 많이 만든다.
파리에서 패션을, 일본에서 모자 디자인을 공부한 감각 있는 디자이너의 수제 모자 공방. 다양한 디자인의 우아한 여성용 모자와 젠틀한 남성용 모자를 직접 디자인, 제작, 판매한다. 젊은 시절 에스모드에서 패션을 공부한 주인장은 50세가 되던 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모자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게 꼬박 4년.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감각에 핸드메이드 기술까지 더해 ‘아야’만의 스타일을 완성했다. ‘보통 사람을 위한, 일상복에 잘 어울리는 디자인’이 콘셉트. 모자에 장식된 주름이나 코르사주, 바느질 선 등에서 군더더기 없는 디테일이 돋보인다. 아야의 모자는 대개 자연섬유를 사용한다. 폴리에스테르 같은 화학섬유는 재봉 시 모양이 예쁘게 나오지 않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수작업으로 제작한 도자기 형태의 향초들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쇼룸에 들어서면 마치 박물관에 온 것 같다. 누는 향초와 비누를 판매하는 공예 숍으로 한눈에 소유욕을 불러일으킨다. 향초는 밀랍과 소이 왁스 등의 천연 재료에 한국적 도자기 형태를 접목해 탄생했다. 촛불 도자 상감기법을 적용해 도자기 미니어처 같아서 실내장식용으로도 그만이다.
#서양디저트 #작은골목가게 #창덕궁 #원서동골목 #전통과현대의만남 #패션완성모자 #현대건축의시작 #예술가의집 #왕의산책로 #원서동골목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