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예술 공간
서울 도심 곳곳에서 크고 작은 전시회가 다양하게 열리고 있다. 미디어를 활용한 전시부터 VR과 AR 등 신기술을 결합한 체험형 전시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색다른 디지털 경험을 할 수 있는 예술 공간들과는 다르게, 과거의 시간을 기록하여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하는 미술관들이 있다. 바로 예술가들이 직접 거주하면서 작업 활동을 했던 집이 미술관으로 재탄생한 곳들이다. 독자적인 화풍으로 유명한 박노수 화백이 40여 년 간 거주했던 집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조각가인 최만린 작가가 30여 년 간 살았던 집이 대표적이다. 예술가들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미술관이 된 집’으로 함께 떠나보자.
80년 된 고택이 미술관으로
#박노수미술관 #절충식가옥
복작한 서촌을 벗어나 한적한 골목길 끝에 다다르면 오래된 집 하나가 있다. 한눈에 봐도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하얀 대문 뒤로 2층짜리 주택이 빼꼼 고개를 내민 이 곳이 바로 ‘박노수미술관’이다. 1937년 친일파 윤덕영이 자신의 딸을 위해 지어진 이 집은 1973년 남정 박노수 화백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약 40여 년 간 이곳에서 생활하며 작품 활동에 몰두했던 박노수 화백은 자신의 작품과 함께 고택(古宅)을 사회에 환원했다. 오랜 역사를 가진 고택은 종로문화재단에 의해 2013년 미술관으로 재탄생했다.
‘박노수미술관’은 한식과 양식이 결합된 절충식 기법으로 지어졌다. 서까래를 노출한 박공지붕*은 옛 정취가 살아 숨쉬는 서촌의 풍경을 닮았다. 그러면서도 붉은색과 하얀색이 어우러진 가옥에 서양 건축을 대표하는 현관의 포치**를 더해 이색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내부 공간을 감싸고 있는 온돌과 마루에서는 고즈넉한 한국 전통의 미가 느껴진다. 동시에 지붕 위로 솟은 3개의 굴뚝과 연결된 3개의 벽난로가 있는 ‘박노수미술관’은 동서양이 잘 어우러진 건축물이다.
*박공지붕 : 책을 엎어 놓은 모양으로, 측면 벽이 삼각형으로 된 각도가 매우 예리한 경사 지붕.
**포치(porch) : 비바람을 피하기 위한 목적 등으로 건물의 현관 또는 출입구 부분에 튀어나와 지붕으로 덮인 부분.
오래된 고택은 박노수 화백이 생활하던 당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가 실제로 생활하던 거실과 부엌, 화장실 등의 공간을 그대로 살려 전시장으로 활용했다. 화백이 사용하던 붓과 도구 등을 진열한 작업실에서는 작품을 그리는 박노수 화백의 모습이 눈 앞에 저절로 그려진다. 곳곳에 패이고 까진 흔적과 한 걸음 씩 내딛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마루 바닥에서는 고택이 겪은 긴 세월이 느껴진다. 80여 년이라는 긴 세월에도 불구하고 관리 보존이 잘 된 이 건물은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1년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1호로 등록되기도 했다.
오래된 주택을 미술관으로 개조하다보니 여러 제약이 있었다. 전시장으로서는 공간이 협소한 ‘박노수미술관’은 다른 미술관들에 비해 작품 수가 현저히 적은 편이다. 그러나 ‘박노수미술관’은 공간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 된다. 박노수 화백이 직접 종자 씨를 받아와서 심은 감나무와 수집한 수석 등으로 조성된 정원이 특히 그렇다. 그는 아끼는 수석 하나하나를 직접 고르고, 배치하며 정원에 풍경이라는 하나의 작품을 만들었다. 고택이 주는 고즈넉한 분위기와 화백의 정성 어린 손길이 닿은 정원의 아늑함 속에서 관람객들은 또다른 작품을 만나게 된다.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1길 34
운영시간 화~일요일 10:00 ~ 18:00 (매주 월요일 휴무)
예술가의 공간에서 지역 사회를 위한 미술관으로
#최만린미술관 #공공미술관
한적한 성북구 주택가에 위치한 ‘최만린미술관’은 가파른 언덕 위에 지어진 반듯한 직선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적벽돌이 차곡차곡 쌓인 건물에 아치형 출입구와 원기둥 형태의 담벼락이 어우러져 직선과 곡선미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예스러움이 묻어나면서도 단아한 2층 양옥 건물은 1970년에 지어졌다. 최만린 조각가는 이곳에서 1988년부터 약 30여 년 간 자신의 작품 세계를 만들었다. 예술가의 흔적이 곳곳에 쌓여 있는 이 곳은 이후 성북구와 EMA건축사사무소의 손길을 거쳐 지금의 ‘최만린미술관’이 되었다.
2019년 미술관으로 재탄생한 이 건물은 기존 건물의 모습을 최대한 보존하는 리모델링 방식을 통해 곳곳에 남겨진 최만린 조각가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았다. 건물의 외관과 골격뿐만 아니라 ‘최만린미술관’를 상징하는 목재 천장과 계단, 아치형 문 역시 그대로 남겨두었다. 그러면서도 건물 전체가 하나의 공간으로 통하도록 내부를 최대한 비워내 예술 작품이 한 눈에 들어올 수 있게 했다. 건축미가 돋보이면서도 미술관으로서의 기능을 극대화한 이 건물은 ‘2020년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내부 전시장은 다양한 예술 작품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조각가 최만린의 삶을 엿볼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작가의 생애와 예술관을 소개하는 자료들이 내부 공간을 채우고 있다. 특히 작가가 직접 사용했던 가구와 작업 도구들로 작업실을 재현한 ‘최만린의 작업 공간’에는 작가의 예술적 감각이 짙게 베어 있다. 관람객들은 작가가 생활하던 공간을 고요히 거닐면서 작가가 사용하던 가구와 도구 등을 직접 보고, 만지며 작가의 예술 세계를 온 몸으로 느끼게 된다.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담긴 벽돌로 둘러싸인 정원에도 최만린 조각가의 작품들이 자리하고 있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적벽돌 담벼락과 건물 외벽 사이에 놓인 수공간에서는 생동감이 느껴진다. ‘ㄷ’자로 이어진 정원 곳곳에 놓인 예술 작품들은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식물들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다양한 풍경을 만든다. 예술가의 향기가 짙게 벤 삶의 터전이었던 곳이 이제는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예술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일상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공공 미술관이 되었다.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솔샘로7길 23
운영시간 화~토요일 10:00 ~ 18:00 (매주 일, 월요일 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