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이문세는 <광화문 연가>에서 노래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덕수궁 돌담길과 이어지는 정동길에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들이 많다. 교회, 학교, 극장, 그리고 각종 기념관까지. 근대 서울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은 이 길을 천천히 걷다 보면 알게 된다. 세월을 간직한 채 낡고 깊어진다는 건 얼마나 낭만적인 일인가. 이번 ‘투어스리트와 로컬 사이'에서는 그 낭만을 직접 느껴 보고 싶은 분들, 풍성하고 알찬 정동길 투어를 준비하는 분들을 위해 꼭 들러야 할 건축물을 소개한다. 무더위와 장마로 야외활동이 쉽지 않은 요즘, 쾌적한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여름날 정동길 데이트 코스로도 추천하는 근사한 실내 공간 3곳은 덤이다.
신아기념관
덕수궁 대한문에서 출발해 돌담을 따라 늘어선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로 걸어본다. 정동제일교회와 국립정동극장이 자리한 정동길로 들어서자 펼쳐지는 붉은 벽돌 건물들의 고즈넉한 정경. 오늘 소개하는 신아기념관 역시 이 운치 있는 풍경의 한 면을 장식한다.
신아기념관은 무려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근대 문화유산 등록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한 유서 깊은 건축물이다. 민간 건물의 건축 기법으로는 흔하지 않았던 철근 콘크리트와 슬라브 구조를 활용한 붉은 벽돌 건물로, 1920년대 중반에 짓기 시작해 외국인 고문관들의 임시 숙소와 미국 기업 ‘싱거미싱회사'의 한국 지부 등으로 사용되다 1970년대 들어서는 <신아일보>사의 별관으로 쓰였다. 1980년 언론통폐합 조치로 인해 신문사가 폐간된 이후 현재는 여러 회사의 사무실과 매장이 들어선 상태다.
당시의 건축 구법과 구조가 잘 남아 있다는 평가를 받고, 언론통폐합이라는 현대사의 상처를 품은 현장이 되었다는 점에서 신아기념관은 한국 근현대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깃든 건축물이다. 입구에 마련된 소규모 기념관에서 <신아일보>와 창업자를 위시한 이 건물의 과거를 어렴풋이 더듬어볼 수 있다.
길 건너편에서 전경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해 천천히 건물을 둘러보자. 오랜 세월 속에서 깊은 멋을 더해가는 견고한 외벽부터 대대적인 재단장을 거친 후에도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천장, 기둥, 벽 곳곳의 디테일까지. 아름다운 정동길 중앙에 한 폭의 그림처럼 들어선 근대 건축물에서 새로운 자극을 받아보시길.
서울 중구 정동길 33 신아일보
지하철 1,2호선 ‘시청역' 1, 2번 출구 651m (도보 8분)
신아기념관에 방문할 예정이라면 건물에 입점한 여러 상업 공간도 함께 돌아볼 것.
공예부터 의류까지, 아름답고 섬세한 작품과 제품을 만나볼 수 있는 3곳의 매장을 추천한다.
소일베이커
평소 식기류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라면 202호에 자리한 소일베이커를 방문해 보자. ‘흙을 굽는 사람(soil baker)’라는 뜻의 상호에서 유추할 수 있듯, 소일베이커는 식탁을 채우는 아름답고 실용적인 도자기 테이블웨어를 만드는 브랜드다. 단순하고 소박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은 그릇을 여주 장인들의 손길을 거쳐 여러 종류의 컬렉션으로 선보인다. 해외 유명 레스토랑의 요청에 맞춰 제품을 출시하거나 다이닝 공간의 브랜딩 작업을 맡는 등 탄탄한 제작 역량과 안목으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는 중이다.
쇼룸 구석구석 알차게 배치된 제품들이 눈에 들어온다. 널찍한 사각 테이블부터 그릇을 색상별로 층층이 진열한 나무 선반, 창문 옆 개수대 위에 달린 개방형 상부장까지. 다양한 환경에 조화롭게 녹아드는 도자기의 매력을 십분 살린 공간 연출이 인상적이다. 가구와 집기를 채도가 낮은 색상 위주로 구성해 이 동네와 건물이 주는 차분한 분위기를 이어가는 점도 흥미롭다.
서울 중구 정동길 33 신아기념관 202호
영업시간 화요일~일요일 11:30-18:30 (월 휴무)
지하철 1,2호선 ‘시청역' 1, 2번 출구 651m (도보 8분)
갤러리 모순
소일베이커 바로 옆에는 공예 전문 갤러리 갤러리 모순이 있다. 왜 모순일까?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처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요소들을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조화롭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작가 선정-전시 기획-공간 디스플레이-인터뷰 기반의 온라인 콘텐츠 등 전반적으로 큐레이터 개인의 색채가 뚜렷하게 전해지는 독립갤러리 모순에 오면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한국 문화의 아름다움을 느껴볼 수 있다.
분청 도자기, 나무, 유리, 가죽, 섬유 등 갤러리 모순에서는 카테고리 제한 없이 다양한 종류의 공예 전시를 선보인다. 공통점이라면 각기 다른 개성 안에 단순함/간결함/편안함/우아함 같은 특징이 묻어난다는 것. 자기 고유의 창조성과 뚜렷한 철학이 녹아든 작품을 눈여겨본 큐레이터는 공들여 작가를 섭외하고, 계절감을 고려해 가장 적절한 시기에 맞춰 전시를 진행한다.
미술 ・ 공예 전시가 낯선 분들이라도 걱정할 필요 없다. 기존 대형 갤러리와는 달리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이 감도는 내부에 들어서면 공간이 주는 힘에 이끌려 자연스레 전시를 즐기게 될 테니까. 입구 쪽 복도부터 은행나무와 돌담길이 내다보이는 안쪽 방까지, 분리되면서도 이어지는 흐름이 작품에 대한 감흥을 한층 풍성하게 만든다. 주변 맥락과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감상을 자아내는 공예 작품의 매력. 많은 이들이 갤러리 모순을 통해 한국 공예에 입문하게 되는 이유 역시 그래서일 테다.
서울 중구 정동길 33 신아기념관 203호
화요일~일요일 12:00 ~18:00 (일, 월 휴무 / 전시 기간은 인스타그램 계정 참고)
지하철 1,2호선 ‘시청역' 1, 2번 출구 651m (도보 8분)
가정식패브릭
마지막으로 소개할 곳은 3층에 자리한 가정식패브릭이다. 가정식과 패브릭이라는 색다른 조합의 네이밍이 돋보이는 의류 브랜드로, 자연에서 추출한 소재를 활용해 우리 몸을 편안하게 만드는 옷을 제작한다. 천연 소재의 매력은 입으면 입을수록 드러난다. 시간이 흐르며 내 몸에 맞게 잘 붙는 변화를 겪기 때문. 몸을 옥죄지 않는 넉넉한 실루엣과 부드러운 감촉, 그리하여 오래 입어도 질리지 않는 자연스러운 옷이야말로 이 브랜드가 추구하는 방향이다.
가정식패브릭의 의류에는 화학 섬유가 일절 들어가지 않는다. 봄/여름에는 리넨과 코튼 같은 식물성 섬유, 가을/겨울에는 울과 캐시미어로 대표되는 동물성 섬유 위주의 옷을 선보인다. 소재에 욕심이 많은 만큼 이따금 직접 소재를 제작하기도 할 정도라니, 정동 쇼룸에 들러 양질의 제품을 하나하나 만져보고 경험해 보자.
목재가 주를 이루는 매장 내부 또한 편안한 소재의 옷을 닮아 따스한 분위기가 감돈다. 넉넉한 여백과 삼면으로 난 창문이 주는 밝고 안락한 느낌이 좋다. 창 너머로 보이는 덕수궁 중명전도 운치를 더하는 요소. 쇼룸을 활용해 전시를 열기도 하는데 일러스트, 자수, 유리 등의 작업물이 하나둘 채워지는 공간의 새로운 모습을 보기 위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단골 손님도 적지 않다고 한다.
서울 중구 정동길 33 신아기념관 302호
목요일~토요일 12:00~18:00 (일, 월, 화, 수 휴무 / 전시 기간에는 휴무 없이 운영)
지하철 1,2호선 ‘시청역' 1, 2번 출구 651m (도보 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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