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시간을 간직한 공간
건축물도 사람처럼 생애(生涯)를 갖는다. 사람이 태어나서, 자라고, 죽는 것처럼 건축물 또한 탄생 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역할을 다하고 나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한 명의 사람도 생을 다할 때까지 수많은 일을 겪는데, 더 긴 생을 이어온 건축물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건축은 지역뿐만 아니라 그곳에 머문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두 간직한 그 자체로 역사를 함께 한다. 한 곳에 묵묵히 앉아 서울의 역사를 이야기 하는 ‘시간을 담은 공간’으로 함께 여행해보자.
서울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곳
#어린이대공원꿈마루 #시간의정원
서울 시민이라면 대부분 어린이대공원에서 뛰어놀던 어린 시절을 기억할 것이다. 어린 날의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찬 어린이대공원은 사실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다. 이곳은 본래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비(妃)인 순명황후 민씨의 능을 모신 공간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능은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일본인을 위해 만들어진 골프장이 해방 이후에도 이어졌다. 어린이대공원 ‘꿈마루’는 골프장을 이용하는 방문객을 위한 우리나라 최초의 ‘클럽하우스’였다.
골프장이 어린이를 위한 대공원으로 바뀌면서 ‘꿈마루’ 역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어린이대공원이 문을 연 직후 ‘꿈마루’는 교양관에서 식당, 전시관, 관리사무소 등으로 수차례 모습을 바꾸었다. 여러 번의 증축과 개축을 겪으며 이 곳은 점차 본래의 얼굴을 잃어갔다. 이후 ‘꿈마루’는 재생 건축의 대가 조성룡, 최춘웅 건축가의 손에 의해 한국 근현대 건축물을 대표하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덧붙인 흔적들을 지우고, 북카페와 피크닉정원 등의 프로그램을 채워 다시 어린이들의 ‘꿈’을 담는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꿈마루’는 환상의 공간이 떠오르는 아기자기한 이름과 달리 콘크리트의 웅장함이 돋보이는 공간이다. 거대한 돌출 콘크리트가 튀어나온 입구는 순식간에 주변 분위기를 압도한다. 입구로 들어서면 높은 층고에 길게 뻗은 콘크리트 기둥들이 수직으로 교차하고 있는 천정은 분위기를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공간 전체를 연결하는 중앙 계단은 건물 전체를 관통하는 곧은 직선으로 단정하면서도 오래된 나무 바닥으로 예스러운 느낌이 든다.
빈티지한 외관의 ‘꿈마루’는 과거의 공간처럼 보이지만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한다. 특히 ‘시간의 정원’은 꿈마루의 모든 시간을 담은 곳이다. 클럽하우스였던 시절의 콘크리트 골조를 그대로 두어 '과거'의 시간이 더 도드라진다. 과거의 콘크리트 사이로 들어오는 따뜻한 햇빛의 고즈넉한 분위기는 '현재'의 여유를 듬뿍 느끼게 한다. 무채색의 콘크리트를 따스하게 감싸고 있는 조경들은 매 계절, 매년마다 모습을 달리하며 이 공간에 색채를 더하고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
주소 서울특별시 광진구 능동로 216
운영시간 상시 개방 (카페는 별도 확인 필요)
과거의 석유창고가 문화를 담은 재생 공간으로
#문화비축기지 #생태문화공원
1973년 중동전쟁이 발발하면서 세계적으로 석유파동이 일어났다. 석유값이 계속 폭등하자 우리 정부는 매봉산의 경사면을 깎아 석유를 비축하는 탱크를 만들었다. 석유비축기지에는 당시 서울 시민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석유가 보관되어 있었다. 많은 양의 기름이 보관되어 있던 석유비축기지는 화재 등의 위험을 막기 위해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게 철저히 통제됐다.
1급 보안시설이었던 석유비축기지는 2002년 한일월드컵 개최가 결정되면서 새로운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석유비축기지 바로 앞에 월드컵경기장이 지어지면서 위험시설로 분류되어 2000년 폐쇄됐다. 매봉산 자락에 숨겨져 사람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잊혀가던 석유비축기지는 시민 아이디어 공모를 통해 석유가 아닌 문화를 담는 공간이 되었다. 석유를 보관하던 5개의 탱크는 해체 후 재활용되어 문화비축기지의 6개 공간으로 재탄생한다.
탱크를 이루던 철판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재활용해서 자연스럽게 부식된 외관은 이곳이 지나온 과거의 시간을 담고 있다. 특히 당시 탱크 원형을 온전히 보존한 T3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등유를 보관하던 T4는 석유 탱크가 복합문화공간으로 바뀌면서 만들어낸 이곳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공간감을 경험하게 한다. 어둠이 자욱하게 내려앉은 텅 빈 공간을 가득 채우는 울림을 느껴보자.
T4의 어두운 실내 공간을 나와 옹벽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따라 거닐면 벽에서 자라난 나무가 눈에 띈다. 석유비축기지 당시에는 화재의 위험 때문에 식물이 자라지 못하도록 관리했지만, 탱크가 폐쇄된 동안 옹벽 틈 사이에서 오동나무 한 그루가 자라났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동안에도 이곳의 시간은 멈추지 않고 이어져 온 것이다. 옹벽 틈 사이의 하늘을 향해 드리운 나무는 문화비축기지의 시간이 일시정지 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재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주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증산로 87
운영시간 화~일요일 10:00 ~ 18:00 (매주 월요일 휴무/ 7/1까지 사면 정비 공사 중, 탱크 시설은 관람 가능) ,
카페/매점 10:00-19:00, 야외공원 상시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