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왕조의 안녕을 위해 정궁인 경복궁의 주산을 북악(北岳)으로 정하고, 낙산(駱山)을 좌청룡으로, 인왕산(仁王山)을 우백호로 삼았다. 인왕산은 조선 초기에는 서산(西山)이라 했다. 산의 이름에 인왕을 붙여 왕조를 수호하려는 의지를 담아 세종 때부터 인왕산으로 불렀다. 대부분 화강암으로 뒤덮인 인왕산은 풍화작용으로 인해 기괴한 형상을 한 바위가 많다. 구멍이 숭숭 뚫린 풍화혈이나 절리가 자주 눈에 띄며 바위마다 선바위, 해골바위, 모자바위, 범바위 등 각양각색의 이름이 붙어 있다.
정선,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 국립중앙박물관 겸재의 대표작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는 경복궁 쪽에서 인왕산 치마바위 쪽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이다. 비가 그친 후의 인왕산을 표현한 그림으로 여기에서 ‘제색(霽色)’이란 비나 눈이 갠 후의 산빛이나 하늘빛을 말하는데, 조선의 문인들이 시문에서 즐겨 사용하던 표현이자 맑은 정신을 지향하는 사대부들의 정서적 지표이기도 했다. 그런데 〈인왕제색도〉를 인왕산과 비교해 보면 별로 닮아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예로부터 예술가들은 미의 원형을 자연에 두고 그 모습을 다양하게 표현했다. 실제의 산천을 표현한 산수화를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라고 한다. 반면 우리에게 친숙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는 실제 경치를 바탕으로 하되 이를 재해석하는 주관성이 가미되어 그림이 실제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진경산수화는 조선 회화의 독창적 장르이며 이 분야의 원조이자 대가가 겸재 정선이다. 겸재가 76세 때 병상에 누워 지내던 60여 년 지기 사천 이병연의 쾌유를 비는 간절함을 담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천과 겸재는 같은 동네인 서촌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다.
겸재는 당시 조선을 문화의 중심으로 보는 조선 중화사상을 이끈 노론 가문 출신이며 겸재와 사천의 시대 의식에서 비롯된 우리 고유의 새로운 예술 양식이 진경산수화였다. 〈인왕제색도〉는 비가 갠 뒤의 산을 그린 것이니 화창함이 두드러져야 하겠지만, 그림은 강렬한 먹과 밝은 여백의 대비로 긴장감이 맴돈다. 산봉우리는 앙각(仰角, low angle)으로, 산기슭에 붙은 동네(기와집)는 부감(俯瞰, high angle)으로 처리해 화면에 깊이가 있다. 검은 산봉우리는 잘려 나가게 표현해 기묘한 압박감을 주며 꿈틀거리는 산세, 산을 휘감고 도는 운무는 역동적이다.
정치적·사상적 동지의 우환을 배경으로 한 겸재의 그림에 일말의 정치적 함의가 내포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겸재가 그림에 담은 뜻을 다 알아채기는 어렵다. 분명한 건 겸재는 기존과 달리 실재에 관념을 추가해 〈인왕제색도〉를 완성했고, 인왕산은 그로 인해 더욱 신령스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