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폴리탄 서울의 지하에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는 편리한 지하철 시스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대한 지하쇼핑가와 보행로는 기본이고 이제 역사, 문화, 예술, 자연까지 도입된 지하 공간들이 땅속 깊이 심어지고 있다. 서울의 땅 아래, 미래의 씨앗이 싹트는 중이다.
1970년대 시가전 상황을 가상한 대전차 방호 기지, 종로 세운상가와 함께 세워진 최초의 주상복합건물(70년대의 타워팰리스), 1999년 내부순환로 개통을 위해 상부 2개 층을 허물어야 했던 비운의 아파트 등 그간 ‘유진상가’를 설명하는 말들이 투박하고 어려웠다면, 지금부터는 ‘흐르듯’ 설명할 수 있게 됐다. 홍제천 산책로 조성 이후에도 한동안 단절되어 있었던 유진상가 하부 구간은 지난해 3월부터 개통되었지만, 여전히 어둡고 으슥해서 이용률이 낮았던 것이 사실. 하지만 서울시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통해 지난 7월부터 홍제유연(弘濟流緣)이라는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하천으로부터 유진상가 건물을 떠받치는 100여 개의 기둥만 가득했던 250m의 하부 공간은 이제 빛과 음악으로 그린 전시장이다. 홍제유연은 ‘물과 사람의 인연(緣)이 흘러(流) 예술로 치유하고 화합한다‘는 뜻. 징검다리를 건너 빛을 따라가다 보면 물길을 따라 설치미술, 조명예술, 미디어아트, 사운드아트 등으로 구현된 8개의 작품이 있다. 시민들의 메시지로 제작한 홍제 마니차, 홍제초등학교와 인왕초등학교 학생들이 그린 미래 생태계 등 지역 주민들과의 소통도 잊지 않았고, 휴식 공간도 마련했다. 관람을 마치고 지상으로 올라오면 유진상가 A동 1층에 늘어선 과일 가게와 맞은편 인왕시장 등 서민들의 일상이 새로운 빛으로 다가온다.
지하철에서 내렸을 뿐인데 숲을 만났다. 향기로운 숲 냄새를 지나, 초록으로 우거진 정원으로 향했다. 2019년 3월, 서울시의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통해 6호선, 녹사평역이 새롭게 태어났다. 녹사평역 지하 5개 층 전체에 걸쳐 공공미술 작품을 설치했다. 일상의 최전선에 있는 공간이 예술을 접할 수 있는 플랫폼의 역할을 겸하게 된 것이다. 녹사평 역사 지하 1층은 ‘빛의 형상’, 지하 4층은 ‘숲의 소리’, 지하 5층은 ‘땅의 온도’라는 주제에 따라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을 둘러볼 수 있다. 입장료는 따로 없다. 그저 지하철이 녹사평역 지하 5층에 멈춰 서면 관람을 시작하게 된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가면 마치 예술로 가득 찬 모스크바 지하철역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천장에 치렁치렁 매달려 있는 조형물은 조소희 작가의 ‘녹사평 여기…’다. 알루미늄 선을 코바늘뜨기로 만든 작품이다. 지하 4층의 하이라이트는 김아연 작가의 ‘숲 갤러리’. 역 한구석에 널빤지가 세로로 가득 들어서 있는데, 안쪽으로 들어가 잠시 한숨을 돌리면 숲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개찰구에서 나와 에스컬레이터로 향하는 길목에는 ‘시간의 정원’이 자리한다. 그리고 드디어 하이라이트. ‘댄스 오브 라이트’를 관람할 차례다. 돔 천장을 통해 내려오는 빛이 지하철역 전체를 감싼다. 날씨, 시간, 계절에 따라 녹사평역의 아름다움이 바뀌는 것이다.
2019년 6월1일,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에 역사문화공원이 조성되었다. 서울역과 충정로 사이에 위치한 서소문은 역사적으로 그 의미가 깊다. 조선시대 당시 서소문 밖 네거리에는 국가의 형장이 있었다.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66년 병인박해까지,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가 이루어지며 수많은 신자가 이곳에서 순교하게 된다. 즉 이곳은 한국 최대의 가톨릭 성지이자 순교 성지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은 이 지역 고유의 특성을 시각적으로 구현해 지역의 역사성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만든 것은 물론, 종교라는 틀에서 벗어나 누구나 쉬어 갈 수 있는 예술 공간으로 꾸며졌다. 박물관의 크기는 무려 2만4,000여 평방미터에 달하며 전반적으로 붉은 벽돌이 깔려 있어 고아한 분위기가 감돈다. 지상 1층부터 지하 3층까지, 상시전시실, 기획전시실, 하늘광장, 하늘길, 콘솔레이션 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박물관 입구에 자리한 이경수 작가의 ‘빛의 광장’을 시작으로 눈 닿는 곳마다 예술 작품이 가득하니, 미적 체험 공간이라 해도 무방하다. 지하 3층에 자리한 콘솔레이션 홀에서는 정사각형 형태의 커다란 큐브에서 천주교 박해의 역사와 자연 현상이 담긴 화면이 모차르트의 ‘레퀴엠’과 함께 재생된다. 그 옆에 위치한 하늘광장에는 정현 작가의 ‘서 있는 사람들’이 자리한다. 44점의 작품은 이곳에서 참수당한 44명의 순교자에 대한 헌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근현대사의 역사적 공간이 82년 세월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거쳐 시민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서울 도시 건축전시관의 자리는 과거 일제강점기 총독부 체신국 청사가 있던 곳이다. 서울광장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자리에 지상 1층부터 지하 3층까지 연결된 국내 최초 도시 건축전시관이 자리한다. 내부에는 서울의 도시발전과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도시, 건축, 공간 분야의 아이디어들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를 관람할 때는 지하 3층부터 천천히 지상 1층으로 올라오며 관람하는 것을 추천한다. 현재 지하 3층에 위치한 비움홀에서는 ‘행동하는 도시들’이란 주제로 전시가 열리고 있다. 카테고리는 ‘이동하는, 혼합하는, 재생하는, 참여하는, 적층하는’ 등의 제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동하고 있는 세계의 각 도시를 만날 수 있으며 서울과 공통된 도시 건축 현안을 가진 주요 도시들을 둘러볼 수 있다. 갤러리3에서는 서울시 공공건축물 공모 시스템인 ‘프로젝트 서울’의 응모작 중 11개의 당선작을 전시한다. 지하 2층에는 서울시의 공공건축을 기록한 ‘우리 동네 우리 마을, 서울이 바뀐다’가 전시되고 있다. 지하 1층으로 나와 옆 계단 옥상으로 향하면 국보 31호, 첨성대가 보인다. ‘환생-Rebirth’라는 이름의 작품은 폐차장에서 수거한 헤드라이트로 첨성대를 만들었다.
싱싱한 채소를 지하철역에서 재배한다. 굉장히 이질적인 이야기지만 명백한 사실이다. 2019년 지하철 7호선 상도역에는 국내 최초 ‘메트로팜’이 들어섰다. 메트로팜은 지하철역에 설치된 스마트팜을 뜻하는데 스마트팜이란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자동화된 시스템과 로봇의 손길로 식물을 재배하는 농장을 뜻한다. 첨단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해 식물이 자라는 데 필요한 빛과 온도, 습도, 대기 농도 등을 조절한다. 덕분에 밀폐된 공간에서도 자동화된 설계만 있다면 햇빛도, 비 한 방울도 필요 없이 식물이 자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폐쇄된 실내에서 재배하기 때문에 미세먼지가 섞인 대기에 노출되지 않아 더욱 믿고 먹을 수 있으며 무엇보다 365일 24시간, 언제나 재배 가능하다는 점이 장점이다. 그리고 살균 상태로 재배되기 때문에 병충해가 들지 않아 살충제,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메트로팜에서 수확된 채소들은 샐러드와 주스로 가공되어 판매하고 있다. 무인자판기에서 누구나 쉽게 구매할 수 있으며 일부 채소는 생채소로도 구입할 수 있다. 현재 메트로팜은 상도역을 비롯해 답십리, 을지로3가, 충정로, 천왕역에서 운영 중이며 어린이들을 위한 체험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체험 프로그램은 팜 아카데미 홈페이지에서 예약 신청할 수 있으며 스마트팜 이론교육, 투어, 원물 수확, 샐러드 요리체험 순서로 진행된다.
아모레퍼시픽의 신사옥은 세계적으로 저명한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설계했다. 정연한 흰 정육면체 모양에 2만여 개의 수직 차양들을 드리운 독특한 외관이다. 이처럼 특색 있는 외관은 조선시대 전통 달 항아리에서 얻은 영감이 반영됐다. 시끄럽고 빌딩이 많은 용산에서 순수한 백자처럼 고요함을 지닌 유일한 공간이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APMA)은 아모레퍼시픽의 창업자 서성환 전(前) 회장이 수집한 미술품을 기반으로 1979년 ‘태평양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이후 2009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으며 2018년 완공된 신사옥 지하에 자리 잡게 되었다. 미술관 입구가 위치한 1층, ‘아트리움’에는 뮤지엄 숍, 전시공간인 ‘APMA 캐비닛’이 자리한다. 지하 1층 전시실에서는 현대미술, 한국미술, 고미술을 아우르는 다채로운 기획전시가 펼쳐진다. 현재 ‘APMA, CHATPTER TWO’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이 전시는 아모레퍼시픽이 수집한 회화와 도자, 금속, 목공예 등 다양한 종류의 소장품을 전시한다. 현장 발권시 ‘1타임 당 제한 인원 20명’을 초과하면 30분 정도 대기시간이 발생하니 예약 후 방문을 추천한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APMA) 홈페이지에서 예약을 진행할 수 있다.
1978년 재개발지구로 지정된 공평동 일대는 이후 2010년까지 재개발이 진행됐다. 그리고 2015년 도시환경정비사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공평동에서는 조선시대 한양에서부터 근대 경성까지 아우르는 옛 문화재들이 발굴됐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이때 발굴된 건물, 도로, 골목길 등 옛 흔적들을 보존하기 위해 지어졌다. 발굴된 유구 중 상태가 가장 양호하던 16~17세기 유구를 전시관 내부로 이전, 복원했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 다른 역사박물관들과 확연히 차별화되는 점이라면, 문화재가 묻혀 있던 원위치를 최대한 보존해 전시에 녹였다는 것. 집터, 골목길 등의 위치적 정보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옛 시절 존재했던 모습을 그대로 살리려 노력했다. 지금의 공평동은 조선시대 한양에서도 중부 견평방(堅平坊)에 속했는데, 견편방은 당시 조선 최고의 번화가로 통했다. 즉 관청, 시전 등 주요 시설들이 모여 있었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살았다는 사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을 가장 잘 이용하는 방법은 터를 둘러보며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 시대의 장면들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여의도 환승센터 앞에는 비밀스런 공간이 하나 있다. 횡단보도 옆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등장하는데, 바로 SeMA 벙커로 통하는 길이다. 1970년대 군사정권 시절, 유사시 대통령이 대피하기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벙커’는 2005년 여의도 환승센터 설치를 위한 현지조사 중 발견됐다. 그리고 2016년부터 리모델링을 거쳐 2017년 10월, 서울시립미술관이 운영하는 ‘SeMA 벙커’로 개관했다. 벙커는 크게 역사갤러리와 전시실로 나뉘어져 있다. 역사갤러리에는 옛 벙커의 VIP실에 있었던 소파, 화장실 등과 함께 여의도의 과거 모습을 사진으로 전시해 놓았고 전시실에서는 사진 , 영상, 설치 등 각종 현대예술 전시가 개최된다. 현재 진행 중인 ‘너머의 여정(The Journey of Eternity)’ 전시는 오는 9월13일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이화여자대학교에 있는 복합단지 캠퍼스, ECC(Ewha Campus Complex)는 국내 최대 규모의 지하 캠퍼스다.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을 설계한 유명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Dominique Perrault)에 의해 탄생한 건물로, 원래 운동장이 있던 자리를 파내고 지하 6층짜리 건물을 양옆으로 마치 ‘협곡’처럼 설계했다. ECC는 지하 공간이지만 전혀 지하 같지가 않다. 건물 양쪽으로 시원하게 낸 통유리 창으로 채광이 충분히 들어오기 때문. 전체적으로 흰색으로 채워진 벽이 내부 공간을 보다 넓고 쾌적하게 보이게 한다. ECC는 완공된 해인 2008년 서울시 건축상 대상을 수상했는데, 그 이유가 단순히 미적인 부분에 있지는 않다. 지열과 지하수를 활용한 냉난방 시스템을 마련하고, 건물 꼭대기 층에 정원을 꾸리는 등 ‘생태학적’으로도 훌륭하다는 평. ECC 내부에는 도서관뿐만 아니라 영화관, 헬스장, 음식점, 은행 등 다양한 편의시설이 들어서 있다.
어두컴컴하고 칙칙한 지하보도를 떠올린다면 금물. 지하철 1호선 종각역으로 이어지는 길은 산뜻하고 푸릇하다. 종로타워 지하 2층, 종로서점 앞에 자리한 ‘태양의 정원’은 지상의 채광을 고밀도로 모아 지하로 전송하는 기술을 이용한 도심 속 지하정원이다. 태양광의 정도는 날씨에 따라 변동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고려, 인공조명과 연동한 하이브리드 조명을 활용한 덕에 어떤 날에도 밝은 빛을 유지한다. 약 1년여 간의 공사를 거쳐 올해 초 조성된 ‘정원’에는 유자나무, 금귤나무, 레몬나무 등 과실수를 포함한 37종의 다양한 식물이 자라고 있다. 휴식 공간 외에 문화적 기능도 겸한다. 녹지 옆 계단을 리모델링해 소규모 강 좌나 공연에 이용할 수 있도록 했고, 젊은 창업가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청년복합문화마켓 ‘종로 청년숲’ 또한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