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지만 여전히 먼 곳으로의 여행은 잠시 멈춰있다. 그렇다고 모든 시간을 집에서만 보내려니 마음 깊이 서린 갑갑함이 도무지 해소되질 않는다. 그래서 요즘은 슬리퍼를 신고 여가와 편의시설을 즐길 수 있는 ‘슬세권’이 대세다. 거창한 준비가 필요하지 않은 여행이다. 편안한 옷차림으로 가볍게 걸치고 감각적인 일상이 어귀마다 서려 있는 골목 산책을 나서자. 한적하지만 볼거리 가득한 서울의 ‘힙’한 감성 골목 10곳을 소개한다.
‘뮤지엄’이라면 우아한 옷차림, 격식 있는 행동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흰색 벽면에는 평생 한 번은 볼까 싶은 화려한 작품이 걸려있을 것만 같다. 충무로 필동 어느 골목에서 만난 스트리트뮤지엄을 둘러보고 편견이 깨져버렸다. 필동 스트리트뮤지엄은 비영리 전시공간으로서 중구 필동을 시작으로 남산골 한옥마을 일대 전반을 문화 공간으로 조성했다. 우아한 건물은 없지만 화려한 작품으로 가득하다. 필동 스트리트뮤지엄은 총 8개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퉁이, 우물, 이음, 골목길, 둥지, 사변삼각, 컨테이너, ㅂㅂㅂㅂ벽>이라는 주제로 구성되어 각기 다른 매력을 뽐낸다. 방식도 다양하다. 회화, 설치미술, 미디어아트, 벽화 등의 방식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가장 강렬했던 작품은 <초상의 탄생>으로 유명한 강형구 작가의 자화상 작품이다. 강렬한 빨간색, 개성 있는 마스크. 흘깃 보곤 도저히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압도감이 느껴진다. 이 감정은 충무로 필동의 어느 골목을 평범하게 거닐며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작품이 있는 골목, 우리는 이런 것을 두고 ‘낭만적인 장소’라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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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동 핫플레이스라고 하면 뚝섬역 3번 출구에서 시작해 살곶이다리에 이르는 500m 남짓한 거리, 뚝섬역 상점가를 빼놓을 수 없다. 서울 성수동은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과거 1960년대 성수동에는 각종 제조공장이 밀집해 준공업 단지로 활성화됐지만 1990년대에 들어 쇠퇴의 길을 걸었다. 2005년, 근처 서울숲이 조성되며 점차 활기를 찾게 되었고 현재 과거 낡은 제조공장은 힙스러운 카페와 쇼핑 장소로 변모해 젊은이들의 발길을 끈다. 그중 뚝섬역 상점가는 2차선 차도를 두고 도로변을 따라 작고 큰 상점들이 즐비해 있다. 멋진 카페 옆에는 오래된 공업사가 있고, 맛있는 음식점 옆에는 오래된 인쇄소가 자리한다. 새로움(New)과 복고(Retro)의 매력이 조화롭게 섞여 있다. 거리의 끝에는 살곶이다리가 자리한다. 살곶이다리는 조선시대 건국 초기 한양과 동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로 사용되던 다리다. 뚝섬역 상점가는 젊은 층의 놀이터답게 ‘우리 동네 시장 나들이 체험, 사생대회, 벼룩시장, 공방체험’ 등 다양한 행사를 정기적으로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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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창신동에는 아픈 과거가 회색빛 절벽으로 남아있다. 1910년대 일제강점기, 일본은 서울에 화강암을 기반으로 만든 석조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당시 창신동에 화강암이 풍부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일제는 이곳에 채석장을 세워버렸다. 창신동에서 채석한 화강암으로 조선총독부, 옛 서울시청, 서울역 등을 건축했다. 창신동에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한 때는 한국전쟁 이후부터다. 창신시장과 동대문시장을 주변으로 원단 봉제 작업을 할 수 있는 곳을 찾다 정착한 이들이 대다수다. 2007년 서울 뉴타운으로 지정되며 아파트 밭이 될뻔했지만 주민들의 반대로 2014년 1호 도시재생지역으로 지정되었다. 덕분에 회색빛 절벽 밑 창신동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채석장 절개기 가장 상부에는 ‘채석장 전망대’가 자리한다.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회색빛 절벽 위에 올라 바라보면 그 아래로 한양도성과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발밑에 가득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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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Hip)’한 골목길을 논한다면 을지로가 빠질 수 없다. 복고(Retro)풍 분위기에 새로움(New)을 더한, 일명 뉴트로 감성이 골목마다 가득하다. 그중 가장 돋보이는 곳은 충무로 11길을 시작으로 을지로 노가리골목을 지나 충무로 9길로 이어지는 일대. 바로 ‘을지로 셔터갤러리’가 자리한 길목이다. 이 거리는 50년 전통의 공구 및 도기, 타일 상가가 들어선 골목이다. 저녁 6시가 되어 하루 일과를 마친 상인들은 가게 셔터를 내린 뒤 퇴근길에 오른다. 그때가 바로 을지로 셔터갤러리의 오픈 시간이다. 총 24개의 상점, 43개의 낡은 셔터에 가게가 취급하는 품목을 테마로 그려진 젊은 아티스트들의 그림을 구경할 수 있다. 덕분에 거리는 24시간 활기를 찾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로 바쁘고, 해가 지고 밤이 되면 셔터에 그려진 그림을 구경하는 이들로 거리가 가득 찬다. 어느 셔터에는 아홉 송이의 백합이 피어났고, 어느 셔터에는 도기, 펜치, 전동드릴 등 가게의 이야기가 그려졌다. 세월을 머금어 잿빛으로 변해버린 골목은 형형색색 그림 덕분에 아름다운 생기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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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에 브로드웨이가 있다면 서울에는 구로드웨이(Guroadway)가 있다. 일명 ‘국제문화예술거리’라 불리는 구로드웨이는 신도림역 2번 출구에서부터 유네스코 아태교육원을 지나 국제음식문화거리까지 이어진다. 지하철역 주변으로 오가는 사람들과 쇼핑몰, 마트, 공원 등 편의시설이 집약된 거리 곳곳에 조형물과 조명, 포토존 등 문화·예술적 요소를 가미했다. 신도림 오페라하우스와 아시아 태평양 지역 회원국 47개국과 함께 만든 국제기구인 유네스코 아태교육원, 신도림역 내에 자리한 문화 공간 ‘문화철도959’ 등 구로드웨이에 포함되는 장소는 총 13곳. 신도림역 2번 출구 앞에 있는 안내지도를 따라 찾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늘 그러하듯, 재미 중 먹는 재미는 빠질 수 없다. 유네스코 아태교육원 맞은편 국제음식문화거리에는 고기집, 선술집, 족발집, 횟집 등 다양한 식당들이 빼곡하게 모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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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빌딩보다는 나지막한 가정집, 화려한 풍경보다는 수수한 동네 감성을 좋아한다면 후암동이 답일 수 있다. 인근 이태원과 경리단길의 높은 임대료를 피해 넘어온 상인들이 낡은 주택가 사이에 작은 가게들을 열면서 조성된 후암동 골목은 ‘제2의 경리단길’로 불리고 있다. 정겨운 골목 풍경에 더해져 후암동이 더구나 특별한 이유는 남산을 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 우뚝 솟은 N서울타워가 이정표처럼 발길을 안내한다. 후암동 버스 종점에서부터 남산 산책로, 소월로로 이어지는 길에 진입하다 보면 독특하게도 계단과 승강기가 나란히 자리한 ‘해방촌 108계단’에 닿는다. 서울 도심에선 좀처럼 찾기 힘든 오래된 세탁소와 미용실, 슈퍼마켓과 같은, 정작 후암동을 빛내는 것들은 아주 소소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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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산역과 삼각지역 사이, 한강로 2가 골목길로 젊은이들의 발길이 모이게 된 건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이 들어서면서부터다. 주변의 주택을 개조한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이 하나둘 들어선 거리가 ‘용리단길’로 불리기 시작했다. 용리단길을 즐기는 법은 간단하다. 신용산역 1번 출구로 나와 좁은 골목 사이사이로 자리 잡은 맛집들을 탐방하며 차례로 훑을 것. 식도락 이외에 최소한의 목적성을 띠고자 한다면, 병인박해로 순교한 성직자 및 신자가 묻힌 ‘왜고개 성지(현재는 국군중앙성당)’에 들렀다가 삼각지역 부근의 화랑거리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방법이다. 삼각지역 1번 출구 부근에는 40년 넘는 전통을 이어 온 ‘대구탕 골목’이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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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주한 도시와 가끔은 동떨어지고 싶을 때. 지하철 1호선·경의중앙선 용산역 광장에서 5분 정도 걸어가 보자. 용산역 주변의 쇼핑몰과는 달리 낮은 건물들이 보이고 ‘땡땡~’ 소리까지 더해진다면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다는 의미다. 얼핏 영화 세트장 같기도 한 철길 위로 땡땡 소리를 내며 기차가 지나가는 풍경은 그야말로 향수어리다. 소위 ‘땡땡거리’라 불리는 이 건널목의 정식 명칭은 ‘백빈건널목’인데, 조선시대 궁에서 나와 이곳 근처에 살았던 백씨 성을 가진 궁녀(빈)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옛 철길 특유의 감성을 지닌 땡땡거리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비롯해 여러 드라마의 촬영지로 등장하기도 했다. 하루에만 300대 가량의 기차가 지나니, 언제 가도 같은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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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촌 언덕을 오르고 올라 땀방울이 이마에 살짝 맺힐 때 쯤. 해방촌 신흥시장 간판이 나타난다. 국수집, 정육점, 횟집이 있는 엄연한 시장인데, 구성이 독특하다. 가죽공방, 러시아식 바, 타투 스티커 판매점이 시장 한켠에서 불을 밝힌다. 오락실과 핸드메이드 주얼리 숍, 원테이블 파티룸 식당도 있다. 1953년, 전쟁 이후 월남 이주민들의 터전이었던 신흥시장은 뉴트로 감성 짙은 식당과 감각적인 카페들로 새롭게 꾸며졌다. 어딘가 눈에 익은 가게들도 많다. 신흥시장은 예능 프로그램 ‘백종원의 골목식당’과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촬영지로 등장하기도 했기 때문. 5분이면 시장 한 바퀴를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규모는 작다. 그러나 개성 넘치는 상점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려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든다. 일몰 시간에 맞춰 방문하면 시장 근처 해방촌 오거리와 남산타워가 보이는 골목들에서 서울의 야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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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배사이길은 과연 이름값을 한다. 방배로 42길이라는 지번보다도, 골목 ‘사이사이’에 볼거리가 가득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큰 길 사이로 난, 300m가 채 안 되는 짧은 거리이지만 카페와 식당뿐 아니라 옷가게, 쿠킹 스튜디오, 작업실 겸 아트숍, 공방 등이 활발하게 영업 중이다. 시작은 가볍게 ‘카페 사이로’에서. 범산목장의 유기농 우유로 만든 아이스크림이 인기다. 원목 책상, 스툴, 아이스크림 냉장고 수납장 등 따뜻한 색감의 가구들도 함께 판매한다. 편집숍 ‘구름 바이 에이치(GBH)’의 쇼룸도 놓치기 아까운 장소다. 세련된 옷부터 갖가지 생활용품과 화장품들을 선보인다. 나들이의 마무리는 역시 방배사이길의 터줏대감, ‘세시셀라 팩토리’가 좋겠다. 올해 15주년을 맞이한 세시셀라는 당근 케이크 맛집으로 이미 정평 난 지 오래. 전국의 모든 세시셀라 지점에서 판매되는 케이크는 전부 이곳에서 만들어진다. 조각 케이크가 아닌 홀케이크 주문도 오직 방배점에서만 가능하다고. 산미 없는 깔끔한 아메리카노와 당근 케이크 한 조각에 모든 근심이 훌훌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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