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도 보기도 예뻤던 2020이라는 숫자와 헤어지려니, 더 열심히 기억을 뒤지게 된다. 서울의 기억 속에서 찾아낸 오래된 숫자들은 ‘업력’이 최소 20~30년 이상이거나 대를 이어 가고 있는, 서울의 백년가게, 오래가게들이 처음 문을 연 바로 그 원년들이다.
*백년가게|100년 전통을 이어갈 만한 가게를 발굴, 성장을 지원하는 정책. 중소벤처기업부와 소상공인진흥공단에서 선정한다.
*오래가게|‘오래 가기를 바란다’는 의미로 시민들이 지은 이름이다. 서울만의 정서와 이야기를 지켜 온 가게를 발굴하고 있다.
1942년부터 2005년까지, 약 60년 동안 통의동 보안여관은 수많은 이들의 쉼터이자 만남의 장이었다. 1936년 발간된 문학동인지 <시인부락>의 시작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당시 서정주 시인이 보안여관에 머물며 김동리, 오장환, 김달진 시인과 함께 시작에 임했다. 광복 이후의 보안여관은 젊은 작가들과 예술인들이 서울에서 터전을 잡기 전 묵어가는 거점이기도 했다. 유서 깊은 오랜 여관이 ‘힙’하게 변신한 건 2007년. 복합문화 공간으로 다시 문을 열면서부터다. 여관방의 골조를 그대로 살려 전시장(아트스페이스 보안 1)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2017년에는 구관 바로 옆에 신관 ‘보안 1942’이 오픈했다. 구관과 연결된 2층 서점(보안책방)을 축으로 1층에는 카페(33마켓), 3~4층에는 숙박(보안스테이), 지하 1층에는 또 하나의 전시장(아트스페이스 보안 2)를 갖추고 있다. 전시, 책, 커피, 그리고 보안여관의 세월, 이 모든 것이 경복궁과 북악산 곁에 오롯이 자리한다.
범상치 않은 입구의 계단 길을 오르면 2020년의 서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옛 다방이 등장한다. 오래된 피아노와 진한 나뭇결이 살아 있는 테이블과 소파, 이제는 보기 드문 복층 구조가 옛 향수를 곧장 불러일으킨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다방인 학림다방에는 지난 60년의 시간이 고이 남아 있다. 특히 많은 문학인과 예술인들이 드나들었던 학림다방은 1975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으로 옮겨 가기 전까지 4.19혁명과 5.16 등 근현대의 파고를 뚫고 가며 서울대생들의 아지트로 힘을 보탰다. 지금도 그 감성 그대로, 다방에서는 여전히 LP 음악이 흘러나오고, 영화 세트장 같은 옛 다방에서 중년들과 젊은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커피를 마신다. 이 독특하고 예스러운 다방은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 등장해, 한때 중국인 여행자들의 여행코스로 각광받기도 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태극당의 창업주 고(故) 신창근 파티셰는 우리나라 제과제빵의 선구자였다. 광복 이후 당시 일본인이 운영하던 미도리야 제과점을 인수해 서울 명동에 빵집을 오픈한 것이 지금 현재 태극당의 시초다. 민족의 정체성을 담아 이름을 ‘태극당’으로 짓고 로고에 또한 무궁화를 새겨 넣었다. 태극당은 1970년대 한창 전성기를 누리며 종로를 포함한 서울 번화가에 여러 지점을 냈지만, 이후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에 밀려 사업이 축소되기도 했다. 그러다 신창근 창업주의 손주인 신경철 전무가 2015년부터 1여 년의 리모델링을 진행하며 시설을 정비하고 수페르가, 라인 등 국내외 브랜드들과의 협업으로 ‘젊은’ 브랜드로 도약했다. 이미지는 젊어져도 레시피만은 옛 방식을 고수한다. 대표메뉴 모나카 아이스크림을 비롯해 남대문 전병, 버터케이크 등 프랜차이즈 가게에선 찾을 수 없는 태극당만의 메뉴를 선보이고 있다.
1957년 대림시장에서 국숫집으로 시작해 1959년부터 국밥을 팔기 시작한 삼거리먼지막순대국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순댓국집이다. 저렴하면서도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겠다는 일념을 인정받아 백년가게 1호점으로 선정됐다. 지난 약 60년간 삼거리먼지막순대국이 단골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온 결정적인 이유는 단연 가성비다. 그날그날 공수해 온 신선한 순대와 내장이 한가득 푸짐하게 담긴 순댓국 한 그릇이 5,000원(보통 기준). 순대를 포함해 오소리감투, 막창 등 내장이 함께 제공되는 안주(小)도 6,000원에 제공된다. 착한 가격도 가격이지만, 손님들의 발길을 꾸준히 붙잡는 힘은 맛에 있다. 맛이 강하지 않고 담백한 국물이 매력적인 순댓국과 잘 익은 깍두기와 배추김치의 조합은 ‘원조’의 위엄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마치 박물관처럼, 스튜디오에 들어서자마자 셀 수 없이 많은 증명사진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지난 37년이라는 세월 동안 수많은 연예인, 정치인 등의 사진과 드라마 스틸 촬영을 꾸준히 해 온 쌍마스튜디오는 여의도 방송가의 터줏대감으로 통한다. 1984년 여의도에 처음 오픈할 때만 해도 쌍마스튜디오는 7평 규모의 작은 사진관이었다. 그러다 MBC 사원 출입증 촬영을 담당하는 ‘MBC 지정 스튜디오’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이후 KBS 탤런트실과 연기자 협회 지정 스튜디오 등의 타이틀을 달았다. 화려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함없이 운영된다는 것이 쌍마스튜디오의 매력. 황수연 대표는 현란한 보정 스킬보다는 인물 그대로의 모습을 가장 자연스럽게 담는 데 초점을 맞춘다. <최근 놀면 뭐하니?>의 ‘환불원정대’ 멤버들이 프로필을 촬영한 스튜디오로도 등장했다.
우리나라 탈에는 2가지 계보가 있다. 놀이용 탈인 ‘산대탈’과 의식용 탈인 ‘하회탈’이 그것이다. 산대탈은 강렬한 색감이 특징이다. 조선시대 초기, 광화문 앞에서 금강산 모형으로 무대를 꾸며 산대탈 놀이마당을 꾸몄다고 한다. 하회탈의 경우 의식용 탈로써 마을의 수호신처럼 여겨졌다. 덕분에 방 어느 곳에 고이 모셔두어 무려 800년 동안 원형이 보존될 수 있었다. 탈이 보전되다 보니 정작 하회탈 제작 기법은 전승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현재 탈을 만드는 사람들은 옛 조상의 기억을 통해 탈 제작을 재현 중이다. 그 1세대 중 한 명이 36년 외길을 걷고 있는 인사동 탈방의 정성암 대표다. 인사동 문화의 거리에 그의 ‘탈방’이 자리한다. 4평 남짓한 매장 벽면에는 탈이 가득하다. 1984년 이곳에 처음 자리 잡았을 때는 2평도 채 되지 않는 공간에서 매일 탈을 만들었다. 탈방의 탈은 주로 피나무로 만들어진다. 탄력이 있어 탈이 오래가기 때문이라고.
구하산방은 대한민국 최초의 필방이다. 올해로 무려 108년째 붓과 벼루를 판매하고 있다. 과거에는 마을마다 좌판을 펴 문방사우를 팔았다. 일제강점기가 되자 일본이 매장을 만들고 상권을 형성했는데, 그 첫 매장이 바로 ‘구하산방’이다. 붓의 품질이 좋기로 워낙 유명세를 떨쳤기에 과거에는 이런 농담도 있었다. ‘구하산방을 모르는 사람 중에 크게 된 사람 하나 없다. 특히 글과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모두 구하산방을 거쳐갔다’ 구하산방은 과거 붓을 궁에도 납품했다. 그 증거로 고종 황제와 순종 황제가 이곳의 제품을 사용했다는 액자가 가게 내부에 걸려 있다. 당대 최고의 한국 서화가인 이당 김은호, 청전 이상범, 소정 변관식, 고암 이응노 등이 모두 구하산방에서 재료를 구입했다고 한다. ‘구하산’은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산 이름으로 9명의 신선들이 교유한다는 의미다.
라칸티나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이태리 식당’이다. 서울에서 파스타라면 너무나도 흔하겠지만 50년 이상, 그러니까 반세기에 달하는 세월이 서려 있는 파스타는 오직 ‘라칸티나’에서만 맛볼 수 있다. 라칸티나는 서울 중구 을지로 입구 초입 삼성빌딩 지하 1층에 위치한다. 1966년 문을 열러 지금까지 성업 중이다. 식당 내부로 들어서면 라칸티나 특유의 고풍스러움이 가득 느껴진다. 아치형 입구, 대리석 비너스상, 붉은 행커치프가 올라간 테이블 세팅, 벽면 가득 걸려 있는 그림 작품, 붉은 벽돌의 바. 라칸티나의 음식은 ‘본토’의 맛과 조금은 거리가 있다. 어느 것을 먹어도 특유의 한국적인 맛이 서려 있는데, 그 이유는 오랫동안 대한민국에서 대한민국 사람들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를 추구해왔기 때문이다. 추천 메뉴는 ‘링귀니 라칸티나’와 ‘스파게티 올드 패션드’. 링귀니 라칸티나는 바지락 국물이 흥건한 파스타다. 봉골레라고 하기에는 조금 축축하지만, 바지락 특유의 감칠맛이 폭발한다. 스파게티 올드 패션드는 메뉴판에 ‘라칸티나 특별 이태리 국수요리’라고 설명이 적혀 있다. 아주 어릴 적, 부모님 손잡고 처음 방문한 경양식집에서 맛본 오븐 스파게티 맛이다.
서울은 빠르게 변해왔다. 그 과정을 겪으며 사라져버린 옛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대장간. 뜨거운 화덕에서 땀 흘리며 시뻘겋게 달궈진 쇳덩어리를 모루 위에 올려놓고 내려치는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서울 은평구 불광역 부근, 아직까지 매일 아침이면 묵직한 망치 소리가 들려온다. 1963년부터 지금까지 2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불광대장간이다. 1950년, 박경원 대표는 한국전쟁 중 피난생활에 굶주린 배를 달래기 위해 대장간에서 허드렛일을 돕기 시작했다. 1953년부터는 리어카에 화덕을 만들어 이동식 대장간 형태로 돌아다니며 영업을 하다가 1963년 비로소 불광대장간을 개업하게 되었다. 지금의 위치에 자리 잡게 된 것은 1973년이다. 과거 성행했던 대장간은 공구 제작이 기계로 대체되기 시작한 1980년대를 기점으로 점차 사라지게 된다. 불광대장간은 다행스럽게도 2대째 가업을 이어오며 지금까지 메일마다 화덕에 불을 피운다. 쇠를 화덕에 달궈 망치로 두들기고, 잘라내어 모양을 만들어내는 옛 방식을 그대로 고수한다. 덕분에 다른 제품에 비해 쇠의 구조가 촘촘하고 치밀하다.
용산구 해방촌은 8.15 광복과 함께 월남한 사람과 피란민,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 등 낯선 곳에서 모여든 이들이 하나둘 정착하며 시작된 동네다. 이 아담한 동네 초입에는 일명 ‘항아리길’이라고 불리는 골목이 있다. 작은 마을버스 정류장 건너편으로 위치한 미군부대 외벽을 따라 50m 남짓 항아리가 가득 늘어서 있는 곳, 해방촌의 랜드마크, ‘한신옹기’다. 오가는 외국인 여행객들은 항아리 행렬 앞에서 사진 찍기 바쁘다. 한신옹기는 1967년부터 오직 옹기 하나만 바라보며 달려왔다. 한신옹기 신연근 대표는 지금까지도 연중무휴 가게를 지킨다. 행여나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이 헛걸음하게 될까 걱정하는 마음에서 말이다. 가게 내부 빼곡하게 진열된 옹기들은 모두 이천에서 직접 공수해온 것들이다. ‘한신’의 의미는 남편의 성과 자신의 성을 한 글자씩 따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옹기는 삼국시대부터 만들어 왔다. 세계에서 오로지 한민족만 가지는 독특한 음식 저장 용기인 셈이다. 김치냉장고가 발달한 요즘, 옹기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지만, 여전히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