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숨 가쁜 걸음으로 나아가기에 바빴다면, 잠시 멈춤을 위한 좌표를 찍어 보자. 한적하게 머물다 가기 좋은 숲이, 알고 보면 서울 도심 곳곳에 퍼져 있다. 준비물은 간단히, 간식거리에 책 한 권을 챙기면 끝. 설렁설렁 숲길을 걷거나 숲속 벤치에 앉아 쉬어 가도 좋다. 바야흐로 가을, 넉넉한 나무 그늘은 덤이다.
머리 위에 드리운 초록 '도심 속 숲'이라는 개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곳. 도심에서 쉽게 닿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숲이 제대로 울창하다는 점에서 안산자락길이 그렇다. 독립문역 등 안산자락길에 오를 수 있는 길은 다양하지만 그중 메타세쿼이아 숲길로 곧장 진입하려면 서대문자연사박물관 근처에서 출발하는 편이 유리하다. 자락길 입구에서 약 15분 정도 완만한 경사를 오르면 메타세쿼이아 숲길에 닿는다. 길을 안내하는 별도의 표지판은 없지만 어느 순간 하늘 위로 쭉쭉 솟은 나무들이 머리 위로 드리운다면, 메타세쿼이아 숲길에 다다른 것이다. 데크길 양 사이로 시원하게 자란 메타세쿼이아 군락이 상쾌한 기운을 내뿜는다. 체력이 허락된다면 메타세쿼이아 숲길에서 무악정을 거쳐 봉수대까지 올라 보자. 발밑으로 펼쳐지는 서울의 전경이 보상으로 주어진다.
온몸에 퍼지는 상쾌함 서울에 대나무를 테마로 한 첫 숲길이 생겼다. 작년 여름 서울시는 5개 한강공원에 46억 원의 예산을 들여 나무 1만1,707그루를 심었고, 이중 이촌한강공원에 대나무 5,471그루를 심은 것. 국토이남 지역에서 자라난 대나무와 다양한 관목류를 식재해 이촌한강공원에 약 1km의 산책로를 조성했다. 동작대교 부근부터 자연학습장 주변까지 쭉 이어지는 이 길은 ‘댓바람숲’이라고도 불린다. 계절에 상관없이 늘 푸른 녹음을 선사해 주변 아파트단지 주민들의 산책 코스로 사랑 받고 있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대나무에서 나오는 피톤치드의 농도는 편백나무 못지않아 산림치유 효과가 있다고. 빽빽한 대나무숲 사이를 헤치며 걷다 보면 온 몸에 상쾌한 느낌이 전해져 온다.
피톤치드와 함께 피크닉 ‘숲에서 산책하거나 온몸을 드러내고 숲 기운을 쐬는 일’. 호암산 잣나무 삼림욕장에서라면 삼림욕의 정의를 몸소 경험해 볼 수 있다. 우선 ‘호압사’ 입구를 찾을 것. 호압사 주차장에서 호암산 폭포까지 이어진 호암늘솔길(’언제나 솔바람이 부는 길‘이라는 뜻)이 약 1.2km 가량 이어지는데, 잣나무 삼림욕장은 이 호암늘솔길 구간에 속한다. 50,000㎡의 잣나무 군락으로 이루어진 호암산 잣나무 삼림욕장은 피톤치드와 음이온, 테르펜(숲에서 얻을 수 있는 물질. 신체의 활성을 높이고 살균 작용도 겸한다) 등 몸에 좋은 물질들로 가득하다. 삼림욕은 스트레스를 해소할 뿐 아니라 심신의 안정을 주고 혈액순환 개선에도 도움이 된다고. 또 잣나무의 피톤치드는 모기 등 해충을 쫓는 효과가 있어 여름철에도 이곳에서 야외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서울 둘레길과도 이어지는 호암늘솔길은 휠체어도 통행할 수 있는 무장애숲길이다. 길 곳곳에 화장실, 쉼터 등 편의시설도 잘 갖춰져 있다.
소나무가 모여 사는 곳 북한산 둘레길 중에서도 1구간은 소나무가 가장 많아 ‘소나무 숲길’이라 불린다. 그 소나무 숲길의 종착점에 솔밭근린공원이 있다. 덕성여대 맞은편, 한적한 주택가에 오롯이 자리한 솔밭근린공원에는 무려 971그루 가량의 소나무가 심어져 있다. 공원이 자리 잡게 된 사연을 알고 나면 그 의미가 더 깊다. 과거 사유지였던 이곳은 1990년 아파트 개발지로 선정되며 없어질 위기에 처했고, 주민들과 지방자치단체가 솔밭 보존 운동을 벌였다고. 결국 1997년 서울시와 강북구가 땅을 매입해 2004년 솔밭근린공원으로 개장했다. 3만4,955㎡ 규모의 공원은 솔밭뿐 아니라 벤치와 놀이터, 산책로, 연못 등으로 채워져 있어 산책이 지루하지 않다. 물론 하이라이트는 선선한 그늘을 선물하는 소나무들, 그 사이로 보이는 북한산이다.
작지만 알차다 서울 상월곡동 일대는 마을 지형이 꼭 삼태기(흙, 곡식 등을 담아 나를 때 쓰는 농기구)를 닮아 ‘삼태기 마을’이라고 불린다. 상월곡동에 위치한 작은 숲에 ‘삼태기 숲’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 삼태기 숲은 서울국유림관리소 안에 자리하고 있다. 산림청 소속의 숲을 일반인들에게 개방하기 시작한 건 지난 2015년. 지금도 청사 관리 하에 평일에만 개방한다. 서울국유림관리소 입구로 들어서면 건물 뒤로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 눈에 띈다. ‘숲길 이동로’라는 표지판을 따라 걸음을 옮기면 숲길 전체를 빙 둘러 돌아볼 수 있다. 잘 가꿔진 인공 숲이지만 자박자박 흙길을 걷다 보면 정말로 ‘자연’ 속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연 못, 오두막, 출렁다리 등 아기자기한 요소들은 아이가 있는 가족들에게 인기다.
서울에서 서울을 잊었다 길고 긴 횡단보도를 건너 길동생태공원으로 향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자동차 경적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길동생태공원으로 들어가 3분 남짓 걸으니 서울을 잊었다. 나무, 개울, 풀벌레 소리. 참 더운 날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서늘한 숲의 냄새가 온몸을 감싼다. 길동생태공원은 서울시가 ‘공원녹지 확충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조성한 환경친화형 생태공원이다. 1998년에 준공되었으니 더욱 무성할 따름이다. 자연은 시간이 지나도 낡지 않는다. 면적은 무려 약 2만4,000평 규모다. 광장지구, 저수지지구, 초지지구, 습지지구, 산림지구, 농촌지구 등 다양한 테마로 조성되어 있다. 천천히 둘러보려면 두 시간쯤이 딱 적당하다. 길동생태공원에서 가장 매력적인 지역은 산림지구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데크길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녹음이 우거진 숲속은 매일이 시원하고 선선한 가을의 온도를 유지한다. 가다 보면 나오는 웅덩이에서는 물총새와 왜가리를 만났고 땅에서는 지렁이와 산호랑나비의 애벌레를 만났다. 서울에서 서울을 잊었다.
강남에 떠 있는 초록섬 선정릉의 전경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외딴 섬처럼 보인다. 온통 빽빽하게 들어찬 회색 도시에서 유일하게 녹음을 머금고 있다. 선릉역 8번 출구에서 도보로 5분이면 선정릉 입구에 닿는다. 이토록 가깝다 보니 선릉 근처의 회사원들에게는 그저 ‘산책로’ 쯤으로 알려져 있다. 선정릉은 2009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 왕릉 중 하나다. 선정릉에는 3개의 능이 있는데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왕도정치의 기초를 세운 성종의 능인 ‘선릉’ 그리고 중종의 능인 ‘정릉’ 그리고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이 그것이다. 선정릉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의해 왕릉이 파헤치어 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모를 겪었던 역사 가 담겨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자연은 자연의 방식으로 역사를 위로한다. 산벚나무는 크게 뻗어 햇빛을 가린다. 참나무와 소나무의 화려한 굴곡은 단단한 명필의 붓글씨처럼 기개 넘친다. 특히 정릉에서 선릉으로 향하는 산책로의 풍경이 압권이다. 보드라운 흙길을 따라 한 폭의 동양화 속을 걷는 듯하다.
가을이면 빠질 수 없는 길 서울을 가로지르는 물길은 크게 3개다. 청계천과 한강, 그리고 양재천. 양재천은 관악산에서 서초구와 강남구의 남쪽을 감싸 탄천으로 흘러 한강으로 들어간다. 양재천을 끼고 있는 양재시민의 숲은 우리나라 최초로 숲 개념을 도입한 공원이다. 숲, 그러니까 도심 곳곳에 심어있는 나무를 상상할 것이 아니라 나무가 가득 모여 이룬 곳을 떠올려야 한다. 여기도 나무, 저기도 나무, 정말 무성한 숲만 가득하다. 그 사이를 거닐다 보면 어딘지 모를 메타세쿼이아 길이 ‘자주’ 등장한다. 그중 가장 인기가 많은 메타세쿼이아 길은 양재시민의 숲 옆쪽에 위치한 서초예술공원 사색의 길이다. 숲속에 다양한 조각 작품이 있어 자연에 자리한 갤러리를 구경하는 느낌으로 둘러보면 좋다. 메타세쿼이아 길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가을이다. 메타세쿼이아가 붉게 물들면 그 잎이 땅에 떨어져 땅도 붉게 물든다. 한층 깊어진 가을의 색은 높아진 하늘의 푸른색과도 조화를 이룬다.
자연의 숨결 수유역 2번 출구에서 도보로 10분, 오패산 터널이 보인다. 아직은 서울의 회색이 짙다. 터널에서 쏟아지는 차량 행렬을 피해 계단을 오르니 오패산 나들길이 등장한다. 도시 거주지 한복판에서 이토록 잘 보존된 자연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임에 틀림없다. 오패산 나들길은 오패산(115m)과 벽오산(135m)의 두 봉우리가 이루고 있는 언덕길이다. 총 길이는 2km가 조금 넘으니 1시간 정도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숲 기슭에는 오얏나무가 가득해 봄이면 꽃이 만발한다. 만발한 꽃이 지면 그 자리에 달콤한 자두가 열린다. 오패산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거닐면 점점 호흡이 쉬워지는 것을 느낀다. 사방에 가득한 잣나무 때문이다. 피톤치드는 활엽수보다 소나무, 잣나무 등 침엽수에서 더 많이 발생한다. 오패산 나들길의 끝 무렵에 도착하면 꽃샘길이 펼쳐진다. 1994년, 김영산 사진작가가 암 투병을 이겨내며 가꿔낸 꽃밭이다. 이름 따라 꽃이 샘물처럼 피어난다.
역사를 품고 있는 숲 산림청은 산림과 함께 살아온 선조들의 생활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역사적, 생태적, 경관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큰 자산을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현재 국가산림문화자산 1호가 바로 동대문구 회기동에 위치한 홍릉숲이다. 홍릉숲은 우리나라 최초의 수목원이다. 1922년 고종의 비, 명성황후의 능이 있었던 홍릉 지역에 임업시험장을 설립하며 조성되었고, 이후 2004년 국립산림과학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홍릉숲에서 가장 ‘어른’ 나무를 꼽자면 현재 산림보전연구동 앞 잔디밭에 서 있는 반송일 것이다. 반송은 1892년생, 대략 130살을 바라보고 있다. 반송을 기준으로 산림보전연구동 뒤편 숲길을 따라 산책하다 보면 홍릉 터가 나온다. 터 가운데에는 강렬한 곡선으로 뒤틀린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그 뒤편으로 명성황후의 능을 찾은 고종이 목을 축였다는 ‘어정’도 만나볼 수 있다. 천년의 숲길, 황후의 길, 숲속 여행길, 천장마루길, 문배나무길 등 5개의 탐방로도 조성돼 있다. 서울의 중심에서 역사를 고이 품은 숲을 거니는 일, 낭만은 그런 것이다.